사설

‘최순실 국정농단’ 대통령 사과로 끝낼 일 아니다

2016.10.25 21:14 입력 2016.10.25 22:52 수정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문이 청와대 비선 실세로 통하는 최순실씨에게 사전보고된 사실은 단순한 호가호위를 넘어 헌정질서를 뒤흔든 국기문란 행위다. 박 대통령이 직접 고개를 숙이고 사과했지만 사과로 어물쩍 넘어갈 일이 아니다. 국정 최고 책임자의 연설문이 사전에 청와대 밖으로 유출된 사태는 반드시 진상규명을 통해 책임자를 처벌하고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도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최씨가 사무실에 버리고 간 PC에는 대통령의 연설문, 국무회의 발언, 수석비서관회의 자료 등 200여개의 파일이 담겨 있었다. 이들 자료가 대통령기록물인지 공무상 기밀누설인지 법리적 판단은 2차적인 문제다. 아무런 공직도 없고 어떠한 공적인 감시망에서도 벗어나 있는 비선 실세에게 대통령의 국정운영 방안이 담긴 대국민 메시지가 정식 보고라인처럼 정기적으로 건네졌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박 대통령은 자신의 연설과 정책이 비선 실세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통제됐다는 점에서 중대한 과오를 저질렀다. 대통령의 발언 한마디 한마디는 외교, 안보, 경제정책 등 국가 중대사를 좌우하고 시민들의 일상생활에도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런데 최씨가 대통령의 메시지에 직접 수정을 가하고 재수정 결과까지 보고받은 점은 최씨의 국정개입이 하나의 시스템으로 작동해왔음을 보여준다. 최씨가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외부세력으로부터 부당한 청탁을 받아 대통령의 국정운영 방향에 영향을 미치고 그 대가로 미르재단·K스포츠재단에 거액을 출연토록 했다면 그것 또한 별개의 중대 범죄다.

박 대통령은 그동안 측근 비리가 불거질 때마다 마치 남의 일인 양 유체이탈 화법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박 대통령이 스스로 짊어져야 할 책임을 회피하려 해서는 안된다. 특히 박 대통령은 미르재단 사건 등 최씨의 국정농단 비리를 우려하는 목소리를 “비상시국에 난무하는 비방과 확인되지 않은 폭로성 발언”으로 몰아붙인 바 있다. 박 대통령의 이 같은 발언은 수사 가이드라인으로 작용해 검찰이 시민단체 고발 후 한 달 가까이 다 돼가도록 압수수색도 하지 못한 채 시간만 허비하게 만들었다. 박 대통령은 이번에도 사과하면서 연설문 작성 과정에서 일부 표현상 도움을 받았을 뿐 청와대 보좌진용이 갖춰지고는 의견을 구하지 않았다고 선을 그었다. 이것 역시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수사 가이드라인으로 읽힐 수 있는 부적절한 발언이다.

검찰은 최씨의 국정농단을 둘러싼 파문이 확대되자 뒤늦게 수사팀 인력을 확충하고 최씨가 사용한 태블릿PC를 넘겨받아 범죄혐의가 있는지 검토해보겠다고 했다. 검찰이 이번 사안을 제대로 처리할 것으로 믿는 시민은 없다. 더구나 이번 사안은 대통령도 비리 연루자로서 최소한 참고인 조사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홍만표 법조비리나 새누리당 최경환 의원 인턴 채용비리 당시 핵심 피의자에게 서면답변 한 장 받고 면죄부를 부여한 검찰이 대통령과 청와대 핵심 실세들을 상대로 제대로 수사할 리 만무하다.

박 대통령이 선택할 카드는 많지 않다. 측근들 중 한 명을 내세워 ‘꼬리 자르기’를 시도하거나 우병우 민정수석을 앞세워 검찰 수사에 영향을 미치려 할 경우 더 큰 시민적 저항에 직면할 것이다. 우 수석은 최씨 문제와 상관없이 대통령 측근의 심각한 국정농단 행위를 막지 못한 사실만으로도 당장 사퇴시키고 사법책임을 물어야 한다. 최순실·우병우의 방패 역할을 해온 여당에서도 두 사람을 감싸는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있다.

박 대통령이 최씨의 국정농단에 책임을 느끼고 진정으로 사죄할 생각이 있다면 우선 우 수석 경질로 의지를 보여야 한다. 해외도피 중인 최씨에 대해서도 귀국하도록 설득해야 한다. 국회 역시 박 대통령 입만 바라보기에 앞서 신속히 국정조사나 특검 등 진상규명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대통령도 자신부터 먼저 조사를 받겠다는 의지를 보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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