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은의 폴리티션!]누가 이재명을 지지하는가

[the300]'앙시앙 레짐'의 종언…혁명을 거부하는 기성 정치권의 '안티 히어로'

김태은 기자 l 2016.12.11 11:28



이재명 성남시장이 '천방지축' 대선 행보를 펼치기 시작할 때만해도 그의 목표가 대통령이라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상당수의 야권 관계자들은 그가 차기 대선에서 존재감을 드러낸 후 서울시장에 도전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실제 이재명 본인도 연말쯤 7~8% 정도의 지지율을 달성한 후 내년 초 두자릿수로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했다며 당초 계획이 차질(?)을 빚고 있다고 고백했다.

정치권은 이재명의 무서운 상승세에 대한 의미부여를 애써 피하고 있다. 당내 경선에서 결국 문재인에 저지당할 의미없는 돌풍이 될 것이라 무시하면서. 미국 대선에서 버니 샌더스가 맞게된 결말처럼 말이다. 이재명을 트럼프의 아류쯤으로 치부해 온 경쟁자들은 이제 이재명보다 더 그가 트럼프가 아닌 샌더스가 되길 바라게 됐다.

그러나 이들도 어렴풋하게나마 눈치채기 시작했다. 트럼프와 샌더스 모두 공화당과 민주당 주류 정치에 대한 반동으로 시작해 미국 대선 결과를 완전히 뒤바꿨다.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위해 촛불이 타오르는 동안 오직 이재명의 지지율만 껑충 뛰었다는 것은 박 대통령 탄핵만이 아니라 기성 정치권 전체를 향한 경고음이라는 사실이다.

최근 한국갤럽 차기 대선주자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재명은 한달 전에 비해 무려 10%포인트가 오른 18%를 기록했다. 그동안 차기 대선 양강 구도를 형성해 온 문재인, 반기문과 겨우 2%포인트 차다.

한달 만에 이재명의 지지층으로 흡수된 10%는 누구일까. 안철수를 비롯해 박원순, 손학규 등 대부분의 야권 주자들의 지지율이 하락한 반면 지지 후보를 밝히지 않은 무응답층은 22%에서 17%로 5%포인트 오히려 줄었다. 문재인을 선택하기 꺼려하는 범야권 지지층과 무당층이 이재명으로 이동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른바 중도층으로 취급돼 온 이들이 박근혜-최순실게이트'가 진행되면서 문재인보다 더 과격한 좌파 이미지의 이재명을 대안으로 눈여겨 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야권 주자 1위의 문재인이 1%포인트 상승에 그친 점도 주목할 지점이다.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정권교체를 기정사실화하는 데에 광장의 촛불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했지만 그 수혜자가 문재인이 되진 못했다는 의미다.

이재명 성남시장이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국회 탄핵소추안 표결이 찬성 234, 반대 56, 기권 2, 무효 7표의 압도적 찬성으로 가결된 9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세월호 유가족들과 포옹하고 있다. 2016.12.9/뉴스1 <저작권자 © 뉴스1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촛불이 만든 탄핵 정국에서 이재명이 부상한 것은 박근혜-최순실게이트에 이르게 한 기존의 낡고 썩은 체제를 철저하게 부수고 척결해야 할 시대적 과제와 직접 맞닿아있다. 이재명은 일찍이 "썩어 문드러져 무너져가는 이 나라에는 세종이 아니라 목숨 걸고 구악을 쓸어낼 태종 이방원이 필요하다"며 구시대를 끝장낼 종결자를 자처해왔다. 그의 거친 언행조차 구체제의 모순을 향해 휘둘러질 '칼'의 이미지를 더한다.

이같은 선명성만으로 중도층이 기존 대선주자들을 제치고 이재명에 반응하는 이유를 다 설명하지는 못한다.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교수는 그의 저서 '미국의 주인이 바뀐다'에서 트럼프와 샌더스의 돌풍에 대해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모든 시스템이 망가져가고 있음을 강력히 경고하는 위기 신호"라고 분석한 바 있다. 또한 "민주당 또는 공화당의 후보가 정권을 잡느냐 하는 정권교체 게임을 넘어서는 변화"이자 "문명 전환기의 투쟁"이라고 내다봤다.

우리나라 역시 그동안 '앙시앙 레짐'을 끝내고 새로운 체제를 요구하는 민심이 다양한 형태로 표출돼 왔다. 보수와 진보, 진영 논리를 넘어서는 '새정치'에 대한 열망인 '안철수현상', 독재와 가진 자를 위한 보수에서 탈피하겠다고 선언한 유승민에 대한 찬사, '제3당'의 출현과 여소야대 국면을 만든 선거혁명 등에서 나타난 민심의 요구는 분명했다.

그러나 정치권은 '박근혜-최순실게이트'를 막지도 못했고 이를 수습할 능력도, 의지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안병진 교수는 "한국의 기존 보수 진영은 총체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대혁신을 위한 과감한 행보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으며 "현재의 야권 대선주자들은 문명 전환기에 대한 시대 감각이 무뎌져 있다"고 진단하며 한국 대선에서도 '트럼프-샌더스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예고한다. 

이재명은 변화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 기존 정치권에 대한 반발에서 등장한 일종의 '안티 히어로'다. 국민들은 혁명을 예고하고 있으나 정치권이 혁명적 변화를 거부하면 거부할수록 이재명이 칼을 휘둘러주길 바라는 반발심도 커질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재명은 정치권의 무능과 무책임의 산물인 셈이다.

이재명의 상승세가 돌풍으로 끝날 지, 태풍으로 대선 판도를 흔들 지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유승민의 '정치혁명'이 새누리당 비박(비박근혜)계의 당권 교체로 그친다면, 문재인의 '명예혁명'이 집권에 매몰된다면, 안철수의 '미래혁명'이 '제3지대'의 타협에 머문다면. 

촛불은 계속 불타오르고 '이재명현상'도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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