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민주주의 가로막는 권력의 언어, 일상에서 무한 변주

정대연·고희진·허남설 기자

1부 ② 말을 지배하려는 자,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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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자의 통치 논리

1987년 민주화 이후 물리적 폭력을 앞세우는 ‘힘의 지배’는 어려워졌다. 권력은 그 빈 자리를 ‘말의 지배’로 채웠다. 경향신문 특별취재팀은 1987년부터 2016년까지 30년간의 경향신문 1면과 주요 지면에 보도된 대통령·정치인·재벌총수·고위관료 등 권력자들의 말을 전수조사했다. 분석 결과 독재정권이 즐겨 썼던 국가주의, 색깔론, 왜곡된 법치를 담은 언어는 민주화 이후 정권이 5번 바뀌는 동안에도 뿌리 뽑히지 않았다. 권력이 반복하는 언어에는 더 나은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을 통제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전체 위해 희생하라 - 공동체 앞세워 희생 강요, 거부 땐 ‘이기주의’ 매도

권력은 기회만 되면 “공동운명체”(김영삼 전 대통령)를 강조했다. 주로 ‘위기’나 ‘집단적 목표’와 함께 등장해 노동자 등 특정 계층이나 집단의 일방적 희생을 요구할 때 쓰였다.

“근로자, 기업인, 정부는 모두” “하나로 뭉쳐 어려움을 극복해야” 하는 ‘한배를 탄 사람들’이므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행위는 “사회혼란을 조장해” “전체에 피해를” 준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목소리다]②민주주의 가로막는 권력의 언어, 일상에서 무한 변주

1988년 노태우 전 대통령은 “온 세계가 서울올림픽 성공을 기원하는 터에” “화합의 잔치를 망가뜨리려는 일은 어떠한 허울 좋은 명분에서라도 국민과 정부가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며 민주화 진전을 요구하는 시민들을 공격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3년 철도노조 파업에 대해 “나라가 있어야 노조가 있는 것”이라고, 평택 미군기지 건설 반대운동에 대해 “우리나라가 진보진영만 사는 나라냐”고 쏘아붙였다.

이명박 정권 때 한승수 당시 국무총리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시민들을 겨냥해 “연일 계속되는 시위”로 “한국 경제의 신인도도 급격히 하락하고 있다”고 위기론을 부각했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의 한반도 배치 비판 여론이 고조되던 지난해 7월 박근혜 대통령 발언은 더 노골적이다. 박 대통령은 “이해당사자 간 충돌과 반목으로 정쟁이 나서 국가와 국민의 안위를 잃어버린다면 더 이상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공동운명체 강조는 ‘희생론’으로 이어지고, 나아가 ‘이기주의’ 비판으로 왜곡됐다.

6월항쟁이 절정으로 치닫던 때 전두환 전 대통령은 “투철한 애국심과 자기희생의 충성심을 발휘해야 할 때”라며 ‘자기희생론’으로 시민들 요구를 짓밟으려 했다. 민주화 이후에도 이 같은 논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1996년 말 노동법 날치기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을 향해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작은 이익에 얽매인 사사로운 이기심은 나라의 발전과 국민의 행복을 위해 버려야 한다”고 했다. “노동자가 봉사자 같은 기분으로”(이명박 당시 대통령 당선인), “한걸음 양보하는 공동체 정신이 필요하다”(박근혜 대통령)는 얘기다.

그 연장선에서 “노사안정을 통한 산업평화”(경총 등 경제 6단체, 1989년 11월)를 깬 사람들은 “내 몫만을 요구하는 집단이기주의”라며 책임을 추궁당했다.

반면 정경유착, 부정부패를 일삼아 위기를 유발한 권력자들은 오히려 국익을 명목으로 용서받았다. 2009년 이명박 전 대통령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을 특별사면하면서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라는 “국가적 관점에서 사면을 결심하게 됐다”고 했다.

■불순 세력 조심하라 - ‘선량·불순’ 이분법적 언어로 집단 목소리 무력화

권력은 시민들을 ‘선량한 국민’과 ‘불순한 세력’으로 양분한다. 그리고 서로를 적대하게 만든다. 이분법적 언어로 시민들을 고립시키는 순간 집단의 목소리는 무력화됐다. ‘을들의 갈등’을 조장해 민주주의 목소리를 고립·배제하는 통치였다. 2008년 촛불집회 당시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은 “선량한 의도를 갖고 있으면서도 좌파들의 정치적 구호에 선동돼 정권 타도를 외치는 사람들은 천민민주주의자들에 의해 조종되는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이명박 정권은 “선동 및 배후조종한 자”(김경한 전 법무장관)들의 “혹세무민”(심재철 전 한나라당 의원) 때문에 시민들이 “정보전염병”(이명박 전 대통령)에 걸렸다고 한탄했다. 이들에게는 4대강 사업 비판 여론도 “정치적 선동”(조해진 전 한나라당 대변인)이 원인이었다.

박근혜 정권은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요구에 대해 “배후조종 세력들이”(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 “악성 유언비어”(박근혜 대통령)로 “순수 유가족”(민경욱 전 청와대 대변인)들에게 “잘못된 논리를 입력시”(김 전 대표)켰다는 마타도어 전략을 폈다. 박 대통령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합의 비판에 대해서도 “소녀상 철거하고 연계가 되어 있느니 어쩌니 하는데 정말 합의에서 언급도 전혀 안된 문제인데, 그런 것을 갖고 선동하면 안된다”고 했다.

■본분과 법을 지켜라 - 전교조·학생운동 통제하고 노동자 집단행동 차단

통치자들은 시민들의 ‘말할 자격’도 임의로 규정했다. “근로자”는 “사상적으로 오염되는 일이 없”(노태우 전 대통령)어야 했고, 학생과 교사에게는 ‘본분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고 훈계했다.

1991년 6월 정원식 당시 국무총리서리가 한국외국어대 학생들에게 밀가루 세례를 받자 노태우 전 대통령은 “학생 본분은 물론 인륜에 비추어서도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라며 일벌백계를 지시했다. 교련수업 반대 움직임이 일었을 때는 “더 이상 대학이 황폐화해 가는 현상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김영식 전 문교부 장관)다며 휴교령 발동을 경고했다. 노 전 대통령은 전교조 결성 시도를 “우리의 오랜 문화전통을 감안하면” “용납해서는 안될 것”이라며 막았다.

김영삼 정권은 대학가에서 5·18 특별법 제정 촉구운동이 확산하자 “대학을 학문을 닦고 교육하는 곳으로 보존하기 위해” “단호히 맞설 것”(박영식 전 교육부 장관)이라고 했다.

노동자의 ‘말할 권리’도 권력의 편의에 따라 제한됐다. 단체행동권을 제한한 필수유지업무제도가 대표적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4년 철도·지하철 노조에 “공적인 기능을 갖고 있는 이들이 불법적으로 집단행동을 하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1998년 대규모 구조조정과 민영화 추진을 반대한 노동자들에게 김대중 전 대통령은 “노조가 경영에 간섭해서는 안된다”고 몰아붙였다.

▶통치 언어의 일상 버전

대통령과 고위공무원, 재벌총수 등이 불리한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내세우는 논리는 일상 곳곳에서 응용된다. 국가라는 ‘공동운명체’를 위해 참으라는 논리는 ‘회사를 위해’ 삶을 희생하라는 주문으로 변주된다. 불합리한 처우에 저항하면 ‘타인에게 피해 주는 사람’이란 딱지가 붙는다. 이는 ‘불순 세력이 나라를 망친다’는 통치자 언어의 또 다른 버전이다.


■전체 위해 희생하라 - 공동체가 회사로…개인의 삶 포기 강요

“우리 곧 해외 공연할 거야. 그런데 개런티는 없어. 할래, 말래?”

극단 대표가 이렇게 물었을 때 배우 박은영씨(33·가명)가 할 수 있는 말은 이미 정해져 있다. 해외 공연은 극단 인지도를 올리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단원에게 돌아오는 돈은 없다. 안 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돈 때문에 극단에 협조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일이다. 박씨는 “알겠다”고 답했다.

지난해 박씨는 12개 작품에 참여했다. 8월부터 4개월 동안 단 5일밖에 쉬지 못했다. 그런데도 월급은 20만~70만원을 오갔다. 대표는 ‘최저임금 인상분을 반영하고 공연수익을 단원과 극단이 일정한 비율로 나눴다’고 문자메시지로 설명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금액이었지만 받아들여야 했다. 함께 일하던 사람들은 몇 개월 버티지 못하고 떠나갔다. 박씨는 “합리적이지 않고 상식적이지 않은 것을 요구할 때 ‘공동체’니, ‘희생정신’이니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고 했다.

광고 벤처회사에서 10년간 일한 이희경씨(32·가명)는 “회사를 위한 인내”가 임계치를 넘어서자 일을 그만둔 경우다.

밤 11시까지 야근을 밥 먹듯 하는 것까지는 견딜 만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암수술을 하는 날에도 이씨는 일 때문에 가보지 못했다. 당시 이씨의 회사는 미국에서의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을 앞두고 있었다. 수술 후 어머니는 회복했지만, 이씨는 사장에게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이씨는 “회사 일만 하다가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포기하는 것에 지쳐버렸다”고 말했다.


■불순 세력 조심하라 - 불합리한 처우 지적하면 ‘문제집단’ 몰아

국가가 선량한 시민과 불순한 시민을 나누듯 기업은 불합리한 처우를 지적하는 노동자들을 ‘문제집단’으로 규정해 다른 노동자들과 분리했다.

김성모씨(34·가명)는 자동차 제조업체의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비정규직을 불법으로 사용하는 사측에 맞서 노동쟁의에도 참가했다. 그러나 비정규직의 파업은 차가운 시선을 받았다. 어느 날엔 정규직 노동자들이 파업 현장에 찾아와 “우리도 먹고살아야 할 것 아니냐, 쟁의를 하려면 우리랑 협의하고 하라”며 화를 냈다. 항의한 사람들은 정규직 중에서도 사측 편에 선 사람들이라는 얘기가 돌았다.

김씨가 일하던 공장에서는 비정규직도 계약 기간에 따라 장·단기직으로 나뉘었다. 김씨가 단기직으로는 처음으로 노동조합에 가입했을 때 상사는 대놓고 “너 때문에 다른 단기직이 피해를 본다”고 쏘아붙였다. ‘단기계약’ 비정규직들이 권리 주장에 나서기 힘들도록 계약 기간을 더 줄이면서 김씨 탓으로 돌리기도 했다.


■본분과 법을 지켜라 - 사회 비판하는 학생의 입 틀어막아

국가는 사회를 비판하는 학생들에게 종종 ‘본분을 지키라’며 입을 막아왔다.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라는 말은 이러한 억압이 민주화 30년이 지난 지금도 일상 곳곳에 남아있음을 보여준다.

김민석군(18)은 지난해 12월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촛불집회에 나갔다. 학생들의 참가를 격려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학생이 나설 자리가 아니다”라고 핀잔을 주는 ‘어른’들도 있었다.

김군은 국정농단을 비판하는 대자보를 붙이고 학내 시국선언을 하는 과정에서도 “자부심이 짓밟히는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고 털어놨다.

시국선언을 위해 마이크를 빌리러 간 김군은 일부 선생님들에게 ‘네 뜻을 왜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려는 것이냐’는 말도 들었다. 김군은 “‘너희가 다른 어른들에게 선동당한 것 아니냐는 소문이 돈다’는 얘기까지 들었을 때는 모욕감이 느껴졌다”며 “사회구성원으로서 이번 사태를 같이 해결하자는 의미로 의견을 냈는데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무시당해 화가 치밀었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송윤경 김지원 정대연 허남설 고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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