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 민주화 운동

최근 편집: 2024년 3월 28일 (목)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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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5월 18일, 한반도 서남단의 아름다운 도시 광주와 그 인근 지역에서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국토를 지켜야 할 군인들이 본분을 어기고 동족인 시민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고 무차별적인 살상 행위를 한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분노한 시민들은 물러서지 않고 무장을 하고 폭력적인 군부집단에 맞서서 용감하게 저항하였다. 시민들이 스스로 무장을 하고 불법적인 군인 집단에 저항한 사건은 한국전쟁 이후 한국현대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5월 27일까지 열흘 동안 이어진 이 항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숨지고, 부상당하고, 고문을 당하고, 투옥되었다.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되는 이 비극의 피해 규모는 아직도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 5월 18일에서 27일 사이에 최소 150명 이상의 민간인이 현장에서 사망하였고, 80명 이상이 현재까지도 실종 상태에 있으며, 수천 명이 부상을 당하고, 당시의 부상 후유증으로 1980년 이후에 사망한 사람도 백 명이 넘는다. 군인과 경찰도 26명이 사망했는데, 군사망자는 대부분 군부대 간의 오인 사격에 의한 사고였다. 

[518기념재단 홈페이지 내 '5‧18민주화운동의 성격' 中]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10일에 걸친 광주광역시 내에서 벌어진 항쟁과 국가 폭력을 이른다.

명칭

  • 사건 발생 직후부터 한동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광주사태"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이 때문에 학술적 의도 혹은 당시의 단어 사용을 존중하려는 의도에서 "광주사태"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 신군부 체제가 끝나고 6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사건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되며 해석이 갈리고 이에 따른 선호 명칭도 달라지게 되었다. 집권당이 된 민주정의당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주장하여 이것이 법적 명칭이 되었으나, 통일민주당평화민주당은 "민주화 투쟁" 명칭을 주장하여 협상은 한동안 난항을 겪었다.
  • 광주 내에서는 단순 운동보다는 폭력에 저항했다는 의미를 담아 5·18 광주 민중 항쟁으로 불린다.
  • 사태 발생 당시 계엄군의 폭력에 초점을 맞추는 면에서는 "광주 학살"이라고도 한다.
  • 광주 항쟁에 북한이 개입했다는 음모론을 내세우는 극우 인사들은 "광주사태", "광주폭동", "광주내란" 등으로 비하하여 부른다.
    • 예외적으로 조갑제는 "광주사태는 반공·민주화 운동이었다"라며 북한 개입 음모론을 부정한다.

역사적 배경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의 심복인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저격당하면서 유신 체제는 종말을 고했다. 박정희 대통령 피살사건은 기본적으로 군부독재 집단과 국민 사이의 대립 관계가 반영된 정치적 돌발사태였다. 유신체제는 안보라는 미명 아래 언론·출판·집회·결사·사상·양심의 자유 등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인 국민의 기본적 자유와 권리를 억압한 전형적인 군사독재 체제였다.

대통령의 유고가 확인되자 10월 27일 새벽 2시에 비상국무회의가 소집됐다. 헌법에 의해서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게 되었고, 정부는 새벽 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에 임명되었고, 곧바로 계엄공고 제5호를 통해 대통령 저격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하여 그 책임자로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하였다. 합동수사본부는 보안사령부를 포함 중앙정보부, 치안본부 등 정부의 모든 정보기관을 총괄 지휘하는 막강한 자리였다.

  한편 10‧26사건 직후 군 내부에서는 권력기관을 맴돌며 출세만 노리던 ‘정치군인’을 선별해서 숙정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정치군인’은 박정희 대통령 비호 아래 군부 내에서 최대의 사조직으로 성장한 ‘하나회’를 의미했다. 박 대통령은 군부를 장악하기 위해서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배반하지 않을 충직한 사조직 육성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육사 11기 동기였던 전두환, 노태우 등 박정희의 후원을 받으며 육사 졸업생 가운데 ‘영남인맥’의 우수한 장교들만 뽑아 비밀리에 운영했던 하나회는 군 내부의 주요 보직을 독차지하면서 막강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최대 후견인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이 갑자기 사라지자 그동안 잘 나가던 하나회에 큰 위기가 닥친 것이다.

 위기를 느낀 전두환 소장은 정승화 참모총장이 10‧26사건 당시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에 연루된 의혹이 있다며 이를 조사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그를 강제 연행하기로 계획했다. D-day를 1979년 12월 12일로 잡은 뒤 하나회 출신 소장파 장교그룹을 설득, 합류시키기로 하고 실행에 들어갔다. 결국 12‧12쿠데타로 ‘군권’을 장악한 전두환 사령관은 군부에서 사실상 최고 실권자가 됐다. 그는 다음날 아침 곧바로 군 주요보직에 대한 인사를 단행했다. 주영복 국방부장관, 이희성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황영시 육군참모차장, 노태우 수경사령관, 정호용 특전사령관 등 군 공식 지휘계통을 하나회 멤버이거나 우호적인 인물들로 완전히 바꿔서 이른바 ‘신군부’ 주도세력을 형성했다.

1980년 3월, 서울대 총학생회 출범을 시작으로 4월 초순에는 전국의 주요 대학들이 총학생회를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대학별로 독재 정권에 아부했던 어용교수와 족벌사학 퇴진 운동을 벌였고, 특히 병영집체훈련 거부가 주요 이슈로 전면 등장했다. 이에 광주·전남지역도 타지역과 마찬가지로 정치개혁과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운동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학생운동은 전남대학교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었으며, 조선대학교 등 사립학교에서는 사학재단 비리 척결운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1980년 5월 18일

1980년 5월 17일 21시 40분, 임시 국무회의에서 ‘비상계엄 전국 확대’ 선포안이 찬반토론 없이 단 8분 만에 의결되었다. 그와 동시에 전두환 신군부는 전국 92개 대학에 신속히 계엄군을 투입했다. 국회, 교도소, 언론사 등 보안목표 109곳에는 계엄군과 별도로 전차 4대, 장갑차 60대를 배치했다. 18일 새벽 0시 20분 계엄군은 경장갑차 8대, 전차 4대를 앞세워 국회 정문을 봉쇄했다.

공수부대는 ‘충정훈련’이라는 이름으로 오직 ‘시위진압훈련’에만 몰두해 온 특수부대였다. 원래 공수부대는 전쟁이 나면 적진에 깊숙이 침투해 중요한 인물을 암살하거나 적의 군사시설을 폭파하는 등 특수작전을 수행하는 게 주된 임무다. 보통 때는 침투작전에 대비하여 낙하훈련과 천리행군 등을 통해 최강의 전투력을 갖추고 있었다. 군사정권은 공수부대를 전방이나 적진에 침투시킨 것이 아니라 ‘충정부대’라고 이름 붙여 정권 보위 목적으로 사용했다. 1979년 10월 부마항쟁에 3공수부대를 투입하여 시위를 진압했고, 그 이후 시위진압 목적의 특수훈련을 더욱 강화했던 것이다.

7공수여단 33, 35대대는 5월 17일 밤 10시 30분 목표지점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고 주둔지인 전라북도 금마를 떠나 약 2시간 후 자정 무렵 전남대와 조선대 운동장에 도착했다. 육군본부 ‘정기작전보고 80-5’ 문서에 따르면 7공수는 이미 사흘 전인 5월 14일부터 비밀리에 이동에 따른 절차를 준비했다. 국무회의 의결 이전인 17일 오전 10시 40분 제2군사령관은 31사단장에게 광주지역 8개 전문대에 31사단 병력 투입을 지시했고, 오후 5시에는 7공수를 위해 전남대와 조선대에 천막을 미리 설치했다. 7공수 투입 준비를 비상계엄 확대 이전에 비밀리에 마쳤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계엄군의 움직임을 광주 치안을 담당했던 전라남도 안병하 경찰국장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계엄당국은 경찰에게 알리지 않은 채 공수부대를 은밀하게 이동시켰던 것이다.

광주의 최초 사망자는 18일 공수부대원들에게 무자비한 구타를 당한 청각장애인 김경철(당시 24세)이었다. 김경철은 충장로 제일극장 골목에서 공수부대원들에게 집단으로 두들겨 맞아 쓰러진 채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졌다. 공수부대원들은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굼뜬 그의 행동을 보고 일부러 그런다고 더욱 두들겨 팼다. 그 결과 19일 새벽 3시에 사망했다. 상식적인 수준의 시위 진압이 아니었다. 공수부대는 처음부터 시위대의 기를 꺾어놓겠다는 생각이었다.

  2군사령부의 ‘계엄상황 일지’에는 5월 18일 하루 동안 광주에서 연행된 숫자가 모두 405명이라고 적혀 있다. 대학생 114, 전문대생 35, 고교생 6, 재수생 66, 일반시민 184 등이다. 이 가운데 68명이 두부 외상, 타박상, 자상(대검사용에 의한 부상)을 입었고, 12명은 중태라고 기록되어 있다.

10일간의 타임라인

19일 오전 10시경 금남로에 모여든 사람은 2,000~3,000명에 이르렀다. 18일과 달리 시위대열 속에는 대학생보다 나이가 들어 보이는 일반 시민들이 훨씬 많았다. 10시 40분경, 충장로에서 경찰과 공수부대는 시민을 향해 최루탄을 쏘며 해산에 나섰다. 시민들은 그냥 쫓겨 가지 않고 야유를 보내고, 돌을 던지며 항의했다. 어제의 잔인한 진압에 분노하고 있었다. 군경과 시민의 충돌이 시작된 지 30분 정도 지나자 군용 트럭 30여 대에 분승한 공수부대가 도청 앞과 금남로 사거리에 진출해 시위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밤중에 광주에 투입된 11공수여단이 본격적으로 시위 진압에 나섰다. 오후 4시 50분, 계림동 광주고등학교 앞 도로에서 계엄군이 최초로 발포를 하였다. 고등학생 한 명이 총에 맞아 쓰러졌다. 그는 주위 시민들의 도움으로 즉각 전남대병원에 옮겨져 생명은 구할 수 있었지만, M16 총알이 복부 오른쪽을 관통해 좌측 엉덩이로 빠져나가는 중상을 입었다.

20일 새벽 두 번째 희생자 김안부(35세, 일용노동자)가 광주공원 부근에서 발견되었다. 사망 원인은 ‘전두부 열상’으로 앞머리가 찢어진 것이다. 점심시간이 지나면서 광주 시가지는 다시 팽팽한 대치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어림잡아 10만 명이 넘는 인파가 금남로를 뒤덮었다. 오후 3시 금남로, 공수부대의 진압과 시민들의 저항이 다시 시작되었다. 어제와 달리 시민들 가운데 도망치거나 방관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모두 결사적이었다. 오후 7시, 200여대의 택시가 일제히 헤드라이트를 켠 채 무등경기장을 출발해 금남로에 들이닥쳤다. 밤 9시 20분경, 노동청 앞 오거리에서 시위대의 광주고속버스 차량에 경찰 4명이 깔려서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밤 10시경, MBC 방송국이 불타기 시작했다. 새벽녘에는 광주역 근처 KBS 방송국도 불탔다. 혼란에 휩싸인 광주상황을 전혀 보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벽 1시경, 광주세무서도 불길에 휩싸였다. ‘군대는 국민이 낸 세금으로 유지되는데, 군인들이 휴전선은 안 지키고, 국민을 죽이러 왔다’며 격분한 것이다. 밤 10시 30분부터 11시 사이에 3공수가 방어하던 광주역 일대에서 요란한 총성이 울려 퍼졌다. 시위대 차량이 광주역을 향해 군의 저지선 돌파를 반복적으로 시도하자 3공수부대에서 발포를 시작했다. 시위대의 맨 앞줄에 있던 시민들이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이날 밤 광주역에서 최소 5명 이상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고,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에 앞선 시각 밤 10시경, 광주역 부근에서 공수대원 1명이 시위대의 화물트럭에 깔려 사망했다. 계엄군 희생자로서는 최초였다. 이 상황을 보고받은 최세창 3공수여단장이 부대원들에게 실탄을 지급하고 유사시에는 발포를 할 수 있도록 지시했다.

21일 아침 금남로에는 지난밤 광주역 발포 때 사망한 시신 2구가 등장했다. 대형 태극기에 덮인 채 손수레에 실려 있는 시신은 시민들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오전 9시 25분, 전옥주, 김범태 등 시민 대표 3명은 장형태 도지사에게 공수부대 철수를 요구했다. 공수부대 철수를 건의하겠다는 도지사의 말을 믿고 수만 명의 시민들이 금남로에서 계엄군과 대치하였다. 정오가 넘도록 공수부대는 철수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시민들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 마침내 동요하기 시작했다. 오후 1시 직전, 시위대가 공수부대 저지선을 밀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오후 1시경, 도청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애국가가 흘러나왔다. 애국가가 끝나는 순간 공수부대의 M16 총구가 시위대를 향해 집단 발포를 진행했다. 집단 발포로 몇 명의 시민이 살상 당했는지는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군의 발표와 1988년 이후 피해자 신고 내용을 종합해 볼 때 이곳 현장에서 최소 54명 이상이 총격으로 숨지고, 500명 이상 총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집단 발포의 최초 명령자에 대한 정확한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았으며, 광주역 발포와 더불어 도청 앞 집단발포 명령자를 밝히는 일은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의 핵심 사항이다.

22일부터 25일까지 21날 오후 5시 계엄군의 퇴각으로 평화가 찾아왔다. 물론 공수부대는 27일 항쟁이 끝날 때까지 20사단, 31사단과 함께 광주에서 외부로 통하는 도로 6군데를 완전히 봉쇄하기 위해 후퇴했을 뿐이었다. 시민들은 빠른 속도로 질서를 회복해 가고 있었다. 시장과 상점들이 정상적으로 문을 열기 시작했고, 사회복지단체에 식량 공급도 이뤄졌고, 전기‧수도 등은 관련 공무원들의 지원으로 별다른 어려움 없이 해결됐다. 수많은 부상자들 때문에 혈액 부족으로 곤란을 겪던 병원들도 시민들의 헌혈로 혈액이 남아돌았다. 경찰에 의한 치안유지 활동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은행이나 신용금고 같은 금융기관에서는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으며, 금은방 귀금속 상점에서도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에 발생한 범죄율은 오히려 평상시보다 훨씬 낮았다. ‘수습대책위원회’나 시민군에게 필요한 자금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성금으로 해결되었다. 1천여 명에 이르는 시민군들의 매끼 식사도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지어다 준 주먹밥 등으로 해결되었다.

26일 새벽 4시, 광주 외곽에서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시내로 진입하고 있다는 소식이 무전기를 통해 도청 상황실에 들어왔다. 27일 새벽 도청 소탕작전을 앞두고 시민군의 반응을 미리 떠보고, 교란시키기 위한 ‘기만작전’이었다. 계엄군의 탱크는 시민군이 설치한 바리게이트를 깔아뭉개고 1㎞쯤 밀고 들어와 농성동 한국전력 앞길에 진을 쳤다. 새벽 도청에는 비상이 걸렸다. 청년들이 아닌 나이 든 수습위원들이 계엄군 진입을 막겠다고 앞장섰다. 이성학 장로, 김성용 신부 등 17명이 도청을 출발해 농성동 계엄군을 향해 약 4㎞ 정도를 무거운 침묵 속에 발걸음을 옮겼다. 이른바 죽음을 각오하고 온몸으로 계엄군의 진입을 막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나선 ‘죽음의 행진’이었다. 김성용 신부 등 11명은 그 길로 전라남북계엄분소로 가서 마지막 협상을 진행했다. 계엄 당국은 26일 자정까지 모든 무기를 버리고 도청을 비우라고만 요구했다. 무조건 항복하라는 최후통첩이었다.

27일 계엄군은 작전이 시작되기 직전 광주시와 전남지역의 전화를 모두 끊어버렸다. 항쟁지도부는 계엄군 진입 사실을 시민들에게 알리기로 결정했다. 박영순은 도청 내 방송실에서 최후의 방송을 시작했고, 그 방송은 도청 옥상에 설치된 대형 스피커를 통해 광주 전역에 울려 퍼졌다. 집 안에 있던 시민들은 한 걸음도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공포감이 짙은 안개처럼 도심을 감쌌다. 그날 밤 그녀의 절규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사람들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그 목소리를 들었던 시민들은 청년 학생들이 처절하게 죽어 가고 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때문에 오래도록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우리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3공수여단 특공조는 4개조로 나뉘어 도청을 포위했다. 새벽 4시 무렵 교회당 종소리와 함께 총성이 울렸다. 도청 뒷담을 넘어 침투한 특공조가 맹렬히 총을 쏘아댔고, 사방에서 총탄이 쏟아졌다. 특공조는 도청 내부로 돌격해 들어간 다음 옥상부터 훑어 내려왔다. 각 방의 문을 걷어차면서 닥치는 대로 총을 쏘았고, 도청은 삽시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총소리와 비명이 난무한 가운데 인기척이 나는 곳에 무조건 총격을 가했다. ‘폭도 소탕 작전’, 바로 그것이었다.

 오전 5시 10분경 동이 터오기 시작할 무렵 YMCA, YWCA, 전일빌딩, 관광호텔 등이 계엄군에 의해 완전히 진압 당했다. 불과 1시간 30분 만에 항전은 끝났다. 완전한 소탕을 확인한 3공수 특공조는 20사단에게 도청을 인계한 후 7시경 시민들의 눈에 띄지 않게 은밀하게 광주비행장으로 돌아갔다. 생존자는 ‘총기 소지자’, ‘특수 폭도’, ‘극렬분자’ 등으로 분류되어 군부대로 이송되었다. 이로써 1980년 5월 열흘간에 걸친 광주 민중의 무장 투쟁은 막을 내렸다.

 27일 사망한 시민은 약 25명으로 밝혀졌다. 이 가운데 도청과 그 주위에서 진압작전 당시 사망한 사람은 17명으로 대부분 계엄군이 쏜 M16 소총에 의해 희생되었다. 이날 아침 도청에서 체포되어 연행된 사람은 약 200명 정도였다. 5‧18 기간 중 피해자는 총 5,517명으로 밝혀졌다.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사망자 155명, 상이 후 사망자 110명, 행방불명자 81명, 부상자2,461명, 연행구금부상자 1,145명, 연행·구금자 1447명, 재분류 및 기타 118명 등이다.

영향과 평가

 5‧18민주화운동은 여러 가지 점에서 한국현대사의 분수령을 이룬 정치적 사건이었다. 그래서 국내외의 많은 정치학자와 역사가들은 한국전쟁 이후 한국의 현대사는 1980년 5월 18일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진다고 평가할 정도이다. 그렇다면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의의는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시각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5‧18민주화운동은 현대사에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반독재 저항의 전통을 계승‧발전시킨 운동이었다. 1961년에 군사쿠데타를 통하여 18년 동안 대한민국을 통치한 군부독재 세력에 저항한 시민 불복종 운동이었으며,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1987년의 시민항쟁의 밑거름이 되었다. 5‧18민주화운동은 1960년의 4‧19혁명, 1979년 부마민주항쟁, 1987년의 6월항쟁, 2016~17년 촛불혁명과 함께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 과정에서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역사적 사건이다.
 둘째, 5‧18민주화운동은 군부집단을 주권자인 시민의 통제 하에 두면서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공고화하는 역사적 전기를 마련하였다. 우리나라가 비록 1987년의 시민항쟁을 통해서 헌법을 개정하고 주권자인 시민의 손으로 대통령을 선출하였으나, 그 후로도 한동안 정치 세력화된 군부집단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였다. 그러나 광주에서 시민들이 흘린 피의 대가로 전두환‧노태우 신군부 집단을 재판에 회부하고 군부 세력의 정치 개입을 막을 수 있는 인적 청산을 단행할 수 있었다.
 셋째, 5‧18민주화운동은 인간의 천부적인 권리인 저항권의 정당성과 나아가 그 저항권 수호의 수단으로서 ‘무장투쟁’의 합법성을 처음으로 인정받았다는 의의를 가지고 있다. 서양의 역사와 달리 대한민국 역사에서 부당한 정치권력의 폭력에 대한 저항의 수단으로서 시민의 ‘무장투쟁’은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했다. 그러나 1997년에 우리나라 대법원은 초법적인 군부 집단에 맞선 광주 시민의 무장 저항행위는 불법적인 폭동이 아니라 저항권에 기초한 시민 불복종 행위이자 민주화운동임을 공식으로 인정하였다. 비록 우리나라 헌법에서 국민의 저항권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지는 않으나, 재판부의 이러한 인정은 부당한 국가폭력에 맞서는 시민의 적극적인 저항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헌법정신과 부합함을 확인해주었다.
넷째, 열흘간의 항쟁 기간 중 광주 시민들이 보여준 놀라운 자치 공동체 정신은 시민의 자발적 협동과 이타적 나눔의 정신이 민주주의와 사회 질서 유지의 기본 원리임을 증명하였다. 경찰과 행정 등 정부의 기능이 일시 정지된 상태에서도 광주에서는 강력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고, 모든 물자가 부족한 가운데서도 시민들은 서로 양보하면서 평상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사회 질서를 유지하였다. 5‧18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헌혈’과 ‘주먹밥’은 바로 이 경이로운 공동체 정신의 산물이다.

[518기념재단 홈페이지 내 '5‧18민주화운동의 성격' 中]

5.18은 이후 한국 민주화 운동의 큰 불씨가 되었고 1987년의 6월항쟁을 거치는 한국의 민주화의 시작점이 되었다. 1997년(김영삼 정부)에는 '5.18 민주화 운동'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5.18 민주화 운동은 한국 뿐 아니라 1989년 천안문, 1999년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의 다른 민주화 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 규명은 40여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현재 진행형이다. 2018년에는 미투 운동의 일환으로 미성년자를 포함한 많은 광주의 여성들이 계엄군에게 성폭행을 당한 사실이 밝혀지기도 하였고 2019년에는 전두환이 광주민주화운동 기간 중에 광주에 갔다는 증언이 나오기도 하였다.

이후 연세대, 고려대, 이대, 아주대, 성공회대, 전남대, 한신대, 감리교신학대, 시립대에서는 광주민주화운동(전형)으로 학생을 선발하기도 했다. [1]

관련 미디어

관련 자료 및 참고 사이트

518기념재단 - https://518.org/nmain.ph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