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 전 5·3 민주항쟁 주도...1987년 6월10일 또 거리로
"24살이었죠. 인천기독청년협의회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4·13 호헌 조치가 6월 항쟁에 불을 질렀지요. 6월10일 오후 9시에 부평에서 행진했어요. 나무십자가를 만들어 들고 나갔지요. 누가 십자가를 들고 행진할 지 의논했던 기억이 나네요. 부평역 앞에서 자동차 경적이 울리자 모두가 애국가를 불렀어요. (임병구 인천시교육청 정책기획관)"

1987년 6월10일. 시민들이 군부정권에 맞서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며 거리로 뛰쳐나온 날이다. 6월 항쟁은 6월29일 당시 노태우 후보의 6·29 선언으로 민주화의 기초라 할 수 있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내는 성과를 거뒀다. 올해 6월 항쟁 30주년을 맞이하는 인천은 앞서 1986년 5·3 민주항쟁부터 민주화 운동을 선도적으로 이끌었던 지역이었다. ▶관련기사 19면

들끓는 용광로와 같았던 인천의 모습은 2014년 12월 인천민주화운동센터(전 인천민주평화인권센터)가 발간한 '인천민주화운동사 연표', 87년 인천 6월 민주항쟁 20주년 기념책자, 증언록 등 각종 사료에 상세히 담겨있다. 당시 인천에는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호헌철폐 범국민규탄대회'에 발 맞춰 공동대책위원회가 꾸려진 상태였다.

오후 4시20분. 중구 답동성당 가톨릭회관에서 대회 참가를 알리는 가두방송이 시작됐다.

이후 오후 6시 부평역에서 첫 신호탄이 올랐다. 십자가를 앞세운 시위대가 도로로 쏟아져 나오자 시민과 학생들이 합류하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2000명이 모였다.

택시기사들은 경적을 울렸고 시위대 선두에는 십자가가 세워졌다. 경찰은 최루탄을 쏘며 대오를 해산시키려 했으나, 시위대는 점점 불어나기만 했다.

시위대는 오후 7시가 지나면서 3000여명으로 늘었다. 이들은 대우자동차 공장(현 한국GM공장)을 지나 공단으로 향했다. 9시에는 청천시장, 10시에는 효성동에 이르렀다. 참가 시민들은 어느새 7000여명까지 불었다. 시민들은 음료수와 화장지, 물수건을 전달하며 지지를 보냈다. 이들의 행진은 오후 11시30분 자진 해산으로 끝났다.

인천의 6월 항쟁은 계속됐다. 인하대·인천대 학생들의 교내·교외 집회, 천주교 인천교구 사제단의 성명서 발표, 석바위 사거리에서의 대중토론회 개최, 인천지역 변호사 17명의 시국성명 발표, 백마장 입구 집회가 이어졌다. 민주화를 향한 열망은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는 내용의 노태우 후보의 6·29 선언 이후에도 계속됐다.

/박진영 기자 erhist@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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