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제 오전 11시경에 나온 ‘연합뉴스’를 시작으로, 30여개 언론이 “UN이 삼성전자의 백혈병 문제 해결 노력을 인정했다”는 취지의 기사를 쏟아냈다. 기사 제목부터가 <유엔 인권보고서, “삼성 백혈병 문제해결 노력 인정”>으로 거의 같고, 내용도 도찐개찐.

2.

기사가 말하는 보고서란, 지난해 UN 특별보고관(‘유해화학물질과 폐기물에 관한 유엔 특별보고관’)이 한국을 방문하여 화학물질로 인한 노동자, 소비자, 아동, 지역 사회 인권침해 이슈들을 두루 검토한 후 작성한 24페이지 분량의 보고서인데,

여기에는 반도체 직업병, 가습기 살균제, 화학물질 정보공개, 산재보상 입증책임 등등의 여러 이슈들에 대한 꽤나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검토 내용과 권고 의견들이 적혀 있다.

가령 ‘반도체 직업병’ 문제에 관하여는 다섯 페이지 정도를 할애하여, 삼성전자의 화학물질에 대한 정보은폐, 삼성 보상절차의 일방성과 폐쇄성, 한국 정부의 부족한 해결 노력 등등을 언급하며 개선을 권고하였다.

그런데 그런 내용들 다 차치하고, 한국의 수십 개 언론사가 일제히 같은 제목, 같은 내용의 기사들을 쏟아낸 것 부터가 막장 코메디다.

기사에 이름 올린 기자들 대부분, 이 보고서를 실제 읽어 보지도 않았다는데 오백원을 건다

3.

여기서 ‘숨은그림찾기’가 시작되는데… 그렇다면 연합뉴스를 시작으로 30여개 언론이 일제히 제목으로 뽑은 저 문장은 대체 어디에 등장하냐는 것.

보고서 내용 중, ‘반도체 직업병’ 문제를 다룬 다섯 페이지 분량의 '본문'에서는 그런 문장을 찾지 못해 애먹었는데… '결론' 부분에 한 개 문장이 등장하더라. (이거 찾고 정말 기뻤다.)

He acknowledges internal changes by Samsung Electronics and steps taken to realize the right of former workers to an effective remedy.

음… 아무리 봐도 이것은 국제기구가 어떤 문제를 지적하거나 개선방안을 권고할 때 으레 쓰는 외교적 수사, 덕담 같은데, 한국 기자들은 마치 이 문장이 ‘삼성 백혈병 문제’에 대한 UN의 입장을 요약이라도 하는 냥, 기사 제목으로 뽑아냈다.

▲ 유엔 인권보고서 관련 기사가 30건 이상 쏟아졌는데 연합뉴스 최초 보도를 베껴쓰다시피한 기사가 대부분이었다.
4.

기사들을 훑어보니, 가장 형편없는 왜곡은 맨 처음 기사를 낸 ‘연합뉴스’에서부터 시작되었고, 다른 언론들은 연합뉴스의 기사 내용을 꼼꼼하게 복제한 것으로 보인다. 늘 그랬듯 어떠한 사실확인도 없이.

연합뉴스는 보고서의 내용에 대한 소개를 이렇게 시작한다.

“이 보고서는 “퇴직자들에게 적절한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그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 삼성이 취한 내부적 변화와 노력을 인정한다”면서 “삼성의 협력과 개방성, 지속적인 대화 노력을 높이 평가한다”고 밝혔다.”

앞의 인용구는 위에 언급한 “He acknowledges…” 부분을 번역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다음 인용구인 “삼성의 협력과 개방성, 지속적인 대화노력을 높이 평가한다”는 무엇일까. 아마도 보고서에 등장하는 아래와 같은 문장을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The Special Rapporteur sincerely commends Samsung Electronics for its spirit of cooperation, openness and continuing dialogue with him.

이것은 어디까지나 ‘특별보고관 본인’에 대한 삼성의 태도를 평가한 것이고, “조사에 협조해줘서 감사하다”는 의미정도로 이해하는게 맞지 않을까. 그런데 연합뉴스는 이 문장을 ‘직업병 피해자들’에 대한 삼성의 태도를 평가한 부분인 것처럼 이용했다.

또한 연합뉴스는

“보고서는 한국의 전자산업 현장에서 350명의 근로자가 각종 질병에 걸렸다는 주장이 나왔지만, 산업안전보건연구소 역학조사 등 과학적 조사결과 발암물질을 발견하지 못하고 백혈병에 대한 통계적 유의성을 입증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고 하여, 마치 UN이 이러한 조사결과를 새롭게 확인한 것처럼 썼는데,

2007년·2008년의 이러한 조사결과들이 이번 보고서에 다시 언급된 이유는, 반도체 직업병 문제에 대한 한국 정부의 대응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과정에서, 한국 정부(근로복지공단)가 황유미 씨 등에 대한 산재보상을 거부했던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보고서는 그러한 설명에 이어 이렇게 적고 있다.

“Based on the result of the above-mentioned investigations in 2007 and 2008, the Korea Workers’ Compensation and Welfare Service decided that the health impacts on Ms. Hwang and other semiconductor workers did not qualify as an industrial accident. …(중략)… The Service rejected applications from several former semiconductor workers suffering from occupational disease in adherence to its strict requirement of a causal relationship based on medical evidence and following a requisite investigation.” “위에서 언급한 2007년 및 2008년의 연구 결과에 입각하여 근로복지공단은 황유미 및 다른 반도체 노동자들의 건강 문제를 산업재해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결정하였다. …(중략)… 근로복지공단은 의학적 근거 및 그에 따른 필수 조사에 기반한 엄격한 연관성 요건에 집착하여 직업병으로 고통 받는 전직 반도체 노동자들의 (산재보상) 신청을 거부하였다.”

“Apart from these investigations and the industrial accident compensation insurance scheme, the Special Rapporteur notes a surprisingly low level of action taken by the Government, the primary duty bearer when it comes to respecting, protecting and fulfilling the rights of workers and of victims to an effective remedy.”위와 같은 연구조사 및 산재보상 체계와 별개로, 효과적인 구제에 관한 노동자 및 피해자들의 권리를 존중하고 보호하며 충족시키는데 있어 일차적 책임 주체인 정부가 놀라울 정도로 낮은 수준의 대책을 수행해 왔다는 점에 주목한다.”

또 연합뉴스는 난데없이

“반도체 업계에서는 유엔 인권특별보고관이 반도체 백혈병 논란에 대해 과학적 인과관계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을 사실상 인정하고 기업의 해결 노력을 높이 평가함에 따라 백혈병 논란이 마무리 수순을 밟을 것으로 관측했다.”고 썼는데,

이들은 언젠가부터 삼성이 간절하게 바라고 있는 결과를 점잖게 ‘관측’하고 ‘전망’해왔다. 마치 ‘결국 그대가 바라시는 대로 될 겁니다’라고 주문을 외는 듯. 하긴, 그대의 특별한 어여쁨을 받기 위하여는 이런 주옥같은 포인트가 하나쯤 있어야 되지 않겠나

5.

또 하나의 압권은 ‘아시아경제’다. 제목부터 참신하다. <삼성, 백혈병문제 이어 갤노트 7 사태에도 ‘정공법’>

▲ 아시아경제 9월12일 온라인판.
이번에 보고서를 작성한 UN 특별보고관은 지난해 10월 한국에 대한 예비조사 결과를 발표하는 기자회견에서 “삼성전자 등 유해물질을 다루는 많은 기업의 근로자들이 인권보다는 이윤 추구를 우선순위에 두는 환경에 놓여 있어 우려스럽다”며 다소 강한 어조의 문제의식을 표한바 있다. 아시아경제의 기사는 그 사실을 언급하며, 이렇게 썼다.

“종전에는 삼성이 사태 해결에 의지조차 없다고 비판했지만 그새 시각이 180도 달라져 삼성측의 사과와 후속 조치를 인정했다.”

보고서 전문을 대충이라도 훑어보았으면 특별보고관의 입장이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러면서 기사 제목에 걸맞게, 반도체 백혈병 문제와 갤노트7 사태에 대한 삼성의 대응을 이렇게 평가했다.

“세계적인 인권기구인 UN인권위원회가 입장을 선회한 데에는 삼성의 '읍참마속'에 대한 선의와 의도를 시장에서 인정하고 받아들였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논란이 되는 문제를 피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정면대응함으로써 기업의 신뢰를 지키려는 그간의 노력을 높이 평가한 셈이다”

“'돈은 다시 벌면 되지만 신뢰는 한번 잃으면 다시 회복하기 어렵다'는 절박한 심정이 강도 높은 조치로 이어진 것이다. 전문가들은 시장과 소통하려는 삼성의 행보를 의미 있게 보고 있다.”

이번 갤노트7 사태와 삼성 백혈병 문제 사이에는 연결지점이 많다. 요컨대 삼성전자가 이윤 추구에 몰두하느라 노동자의 건강 물론 소비자의 안전까지 내팽겨 쳤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 두 문제를 이렇게도 엮을 수도 있다는 건, 내 상상력 밖이다. 엄지척.

▲ 매일경제 9월12일자.
6.

수십 개의 언론이 똑같은 제목, 똑같은 내용으로 기사를 쏟아낸 것. 그것도 특정 기업에 아주 이로운 제목과 내용만을 복제하듯 찍어내는 것. 전혀 새로운 일은 아니다. 오히려 지겹다.

다만 UN인권이사회가 15일에 공식 채택할, 그럼으로써 전 세계 정부, 기업, 언론이 검토하게 될, 더욱이 그 전문이 이미 공개되어 있는 보고서의 내용을, 이렇게 두 세 줄로 간단하게 왜곡해 낼 줄은 몰랐다. 그 과감성이 놀랍다. 우리 언론, 정말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이번 기사들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대충 짐작이 간다. 삼성 측이 어느 기자에게 보고서의 내용을 그렇게 풀었을 것이고, 그 기자는 보고서 전문을 확인하지 않은 채 그대로 기사를 썼을 것이며, 수십 명의 기자들은 그 기사 내용의 진위를 전혀 확인하지 않은 채 단지 그 내용이 특정 기업에 이롭다는 이유로 복제하듯 기사를 뽑아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 누구도, 자신의 이름을 단 그 기사가 반도체 노동자들의 생명ㆍ건강 문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1년 가까이 길바닥에서 노숙하며 싸우고 있는 삼성반도체 직업병 피해자들에게 어떤 고통을 안길지, 결국 자신이 한 기업의 악행에 어떤 식으로 협조하게 되는지를 전혀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늘 가장 분노스러운건 이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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