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띠로 때리고 커터칼로 찌르는 시늉하고…우리 회사에도 ‘양진호’가 있다

전현진 기자

봇물 터진 직장갑질 제보

허리띠로 때리고 커터칼로 찌르는 시늉하고…우리 회사에도 ‘양진호’가 있다

ㄱ씨는 힘들고 괴로운 마음으로 직장에 다니고 있다. 직장상사의 집요한 괴롭힘 때문이다. 회식자리에서 이 상사는 소주병을 거꾸로 집어들곤 ㄱ씨를 내려치려는 듯 위협했다. 고객들이 볼 수 있는 영업장 안에선 ㄱ씨의 목을 조르기도 했다. 이 상사는 직원 중 유독 나이가 제일 많은 ㄱ씨에게만 ‘인사 똑바로 하라’ ‘차렷 자세로 정중히 인사하라’라며 틈날 때마다 괴롭혔다. ㄱ씨는 너무 억울하고 원통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답답하기만 하다.

4일 노동인권단체 ‘직장갑질119’가 공개한 사례들을 보면, 수위만 조금씩 다를 뿐 직장 내 ‘양진호’는 곳곳에 있었다. 직장갑질119는 10월 한 달 동안 신원이 확인된 e메일 제보 225건 중 ㄱ씨가 겪은 것처럼 폭력·폭언·모욕 등 악질적인 직장 내 괴롭힘을 호소한, 이른바 ‘양진호 갑질’ 사례가 23건에 달한다고 밝혔다. ‘양진호 갑질’은 사무실에서 부하 직원의 뺨을 때리고 직원에게 살아 있는 닭을 활을 쏴 칼로 베어 죽이게 하는 등 엽기적인 갑질을 벌인 양진호 한국미래기술 회장의 이름을 딴 것이다.

ㄴ씨는 지난 5월 주유소에서 일하기 시작한 후부터 불면증을 겪고 있다. 스트레스로 약을 처방받고 전문의 상담까지 해야 했다. 사업주는 휴식이나 점심시간도 따로 없이 ㄴ씨를 하루 14시간씩 일하게 했고, 일방적으로 정한 현금 100만원을 월급으로 줬다.

주유소에서 점심·저녁 밥을 만들라고 하거나, 자신의 텃밭과 땅을 관리하라고 하는 등 잡무에 동원하기도 했다. 거절하면 쏟아지는 욕설과 화가 두렵지만 다달이 내야 하는 월세 때문에 ㄴ씨는 불합리해도 참고 견딜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은 ㄴ씨가 주유소 손님에게 욕설을 듣고 폭행당했다. 하지만 사업주는 가해자가 자신의 친·인척이라는 이유로 합의를 종용했다. 사업주는 “내 집에서 일하려면 그 정도는 참아야 월급을 받을 수 있다. 경찰에 신고하면 큰 실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용실에서 인턴으로 일했던 ㄷ씨는 갑자기 ‘오늘까지만 (일)하고 그만두라’는 말을 들었다. ㄷ씨가 황당해하며 이유를 묻자 미용실 원장은 오히려 화를 내면서 급여 인상분 대신 ㄷ씨가 받기로 한 빗·고데기 등 미용용품을 내놓고 나가라고 했다. ‘월급 대신 받은 건데 왜 놓고 가야 하느냐’는 ㄷ씨의 항변에 이 원장은 “내 가겐데 어쩌라고. 가지고 가면 절도죄로 신고할 테니까 가져 가려면 가져가 봐라”라고 말했다. ㄷ씨는 고용노동부에 문의했지만, 5인 이하 사업장이기 때문에 부당해고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답을 들었다고 했다.

■ “힘없는 우리, 자발적 퇴사가 답인가요?”

우리 회사에도 ‘양진호’가 있다
‘직장갑질119’ 사례 공개

허리띠로 때리고 커터칼로 찌르는 시늉하고…우리 회사에도 ‘양진호’가 있다

“능력이 안되면 몸으로라도 때워야지, 시X. 인격모독 당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나이 처먹고 와서 뭐하느냐”
“사장 친척에게 폭행당했는데 합의하라고 겁박”
“법인 이사장 여행·해외 출장 땐 안부 문자 보내라 강요”
“상사가 2년 가까이 따돌려 팀원들과 식사도 못해”

직장 내 괴롭힘은 욕설과 인격모독 등 교묘하고 집요한 언어폭력으로 이뤄지는 경우도 많다. 회식자리에서 허리띠를 풀러 직원을 때리거나 물컵을 던지는 상사도 있다. 이름 대신 ‘야’라고 부르고, ‘시X’ ‘개XX’ 등 욕설은 기본인 경우도 있다. 부하 직원 앞에서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치며 욕을 하고, 커터칼로 찌르는 시늉을 하는 상사도 있었다. “나이 처먹고 와서 뭐하느냐”는 식의 인격모독도 적지 않게 벌어진다. 문제를 제기하는 직원에겐 괴롭힘이 더 심해진다.

영업직 회사원인 ㄹ씨는 상사가 자신의 ‘목숨줄’을 쥐고 있다고 했다. 상사가 그의 재계약 여부를 결정할 전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ㄹ씨와 그의 동료들은 상사의 기분에 따라 폭언과 협박에 노출된다. 영업 실적이 조금이라도 상사의 성에 차지 않을 때마다 모욕적인 발언이 이어진다. “대가리 안 쓰냐? 입에 걸레라도 물어야 (머리가) 돌아가느냐?” “너네들 어차피 갈 데 없잖아” “능력이 안되면 몸으로라도 때워야지, 시X.”

특정인을 공개적으로 따돌리는 직장 내 괴롭힘도 있었다. 직장인 ㅁ씨는 점심 회식 때마다 상사로부터 “ㅁ씨는 빼고 가라”는 말을 들었다. ㅁ씨가 상사에게 ‘왜 그러시냐’고 묻자 “너는 먹을 자격이 없다” “너는 밥값을 못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에 항의하면 “너 기분 나쁘라고 일부러 하는 말이다”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다”라며 오히려 조롱했다. 하루 평균 1차례 이상 일상적으로 괴롭힘을 당한 ㅁ씨는 2년 가까이 팀 직원들과 식사를 하지 못하고 구내식당에서 혼자 끼니를 때워야 했다.

업무와 무관한 황당하고 부당한 지시도 직장생활을 힘들게 하는 괴롭힘이다. 직장갑질119에 접수된 제보에 따르면, 한 법인에선 1박2일 연수 때 법인 이사장에게 A4용지 한 장 분량의 편지를 의무적으로 쓰게 하고, 밤늦게까지 연수 일정을 진행한 뒤 오전 6시에 운동회를 하겠다며 강제로 바닷가로 집합시켰다. 법인 이사장이 해외 출장이나 여행을 떠나면 ‘잘 다녀오시라’는 안부 문자메시지를 보내도록 강요하는 황당한 지시도 있었다. 또 법인에 후원금을 내라고 강요하거나 종교행사 참석과 십일조 등 헌금을 강권했다. 1장에 1만원짜리 행사 티켓 20장을 강매하기도 했다.

이처럼 ‘우리 회사 양진호’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수많은 피해자들이 있지만 현행법으로는 인간성을 파괴하는 상사의 직장 내 괴롭힘을 처벌하기 어렵다.

직장갑질119는 “현행 근로기준법은 사용자의 폭행만을 처벌할 수 있을 뿐 양진호 회장 같은 폭언이나 엽기 갑질은 처벌할 수가 없다”면서 “피해자가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게 되어도 산업재해를 인정받기 쉽지 않다. 폭언과 모욕을 견디다 못해 그만두면 ‘자발적 퇴사’가 되어 실업급여도 받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직장갑질119는 “존중해야 할 회사 직원을 하인으로 여겨 폭행·폭언·엽기 갑질을 일삼는 ‘양진호’는 곳곳에 있다”며 “직장 내 괴롭힘을 금지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조속히 통과돼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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