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트 폭력

김현진 | 에세이스트
[세상읽기]데이트 폭력

이것이 만약 ‘폭력’에 대한 글이었다면 나는 차마 이 글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글을 쓰기에 나는 떳떳한 인간이 못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고 청탁을 받아들인 것은 이것이 ‘데이트 폭력’에 대한 글이어서였다. ‘데이트 폭력’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A군이 술김에 찢어 놓았던 왼쪽 귀를 꿰매던 응급실의 불빛과 의료용 바늘의 감촉이, B군이 발로 차서 금이 갔던 왼쪽 갈비뼈가, C군이 이단 옆차기를 해서 부러졌던 오른쪽 갈빗대가 얼얼해져 왔다. 벌써 몇 년 전인데도. 내가 마지막으로 사랑했던 남자는 나를 때리지는 않았다. 단 한 대도 때리지는 않았지만 야 이 XX야 차라리 때려라, 하고 악을 쓰고 싶은 사람이었다. 화가 나면 욕설을 참지 못하는 성정이었고, 태어나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욕을 그에게서 다 들었다. 욕설도 데이트 폭력에 포함될까.

그 처참한 말들을 들으며 내 영혼이 입었던 내상을 생각하면 그 역시 데이트 폭력의 범주에 넣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내가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말을 했을 때, 그는 즉각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 “이런 XX가…” 하는 욕설과 함께 내 얼굴을 향해 휘둘렀다. 차라리 그대로 갈기기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참 신통한 재주로 그는 신발짝이 내 뺨에 닿기 0.1초 전에 손을 멈췄다. 그리고 나를 향해 씨익 웃어 보이며 말했다. “야, 나 너 안 때렸다? 분명히 안 때렸어? 너 어디 가서 내가 때렸다고 하면 거짓말 되는 거 알지?”

차라리 때리지. 한 번 더 내가 그의 심기를 거슬렀을 때, 그는 자신의 기분이 풀릴 때까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으라고 했다. 물론 나는 그 자리를 뛰쳐나갈지 말지 수십 번 고민했다. 그리고 결국 나는 그의 원룸 귀퉁이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세 시간쯤 지났을까, 다소 기분이 풀린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에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나 속상하게 하지 마, 알았지?”

남자 보는 눈이 그렇게 없느냐, 어지간히 못났다, 하고 나에게 혀를 끌끌 차실 분들이 있겠지만 그는 회사에서는 상사들에게 신임받는 인사고과 1위의 성실한 직원이었고 동료들과의 관계도 원만한, 지극히 정상적인 인물이었다. 내가 당당하고 씩씩하게 살아왔을 거라고 생각하셨던 독자들은 이쯤에서 꽤나 실망하셨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자랑스럽지도 않은 구차한 이야기들을 털어놓는 것은 나처럼 그나마 페미니즘 물 좀 먹었다는 여자, 혼자 똑똑한 척은 다 하는 여자, 불의를 보았을 때 별로 참지 않고 어디 가서 성격 좋다는 이야기 들어본 적 없는 나 같은 여자까지 폭력을 휘두르는 연인을 사랑한다는 착각에 빠져 데이트 폭력을 한계까지 견뎠을 정도라면, 여자다움의 미덕을 주입받고 자란 선량한 보통의 한국 여성들은 이런 경우를 당했을 경우 도대체 어떻게 살고 있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해서이고, 그들이 결코 혼자가 아니며 바보 같아서 당하는 일도 아니고 이 한심스러운 나를 보고 조금이라도 용기를 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용기를 내어 거기에서 나와야 한다.

나를 때린 남자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했다. “나 절대 여자 때리는 남자 아니야. 이번이 처음이야.” 내가 자기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거였다. 이런 점에서 성폭력과 데이트 폭력의 희생자들은 닮았다. 내가 좀 더 몸가짐을 조심했더라면, 내가 성질을 건드리지 않았더라면…. 그러면서 점점 자책하게 되고, 마침내 고립된다. 그리고 폭력적인 연인들은 대부분 폭풍의 시간이 지나가면 그것을 보상하기 위해 배나 달콤해진다. 다음부터는 절대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에 알고도 속으면서 혹시나, 혹시나 하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혹시 그 남자의 이제 변할 거라는 약속을, 너만 사랑한다는 말을, 나는 너 아니면 안 된다는 말을 아직도 믿고 있는 당신이라면 최대한 빨리, 지금 즉시 그를 떠나라. 그는 결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당신의 육체와 영혼에 그가 산산조각낼 수 있는 부분이 아직 남아 있는 것뿐이다. 더 부서지기 전에 일어나라, 당신. 우리를 구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우리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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