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을 위한 동화

시간 빈곤에 시달리는 사람은 결국 탈이 난다

이유진 기자

잃어버린 영혼

올가 토카르축 글·요안나 콘세이요 그림

사계절 | 48쪽 | 1만8000원

[어른들을 위한 동화]시간 빈곤에 시달리는 사람은 결국 탈이 난다

시간빈곤자의 나라, 대한민국.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만년 1·2위 최장 노동시간 국가에는 야근과 주말 근무, 돌발노동에 시달리는 시간빈곤자들이 넘쳐난다.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처음 배운 말로 “빨리 빨리”를 꼽는다는 우스갯소리에 마냥 웃을 수만 없는 것은, ‘빨리 빨리’ 문화 속에서 소모되고 지친 누군가의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일을 아주 많이, 빨리 하는 사람이었지요. 영혼은 어딘가 멀리 두고 온 지 오래였습니다.” 폴란드 출신 소설가 올가 토카르축의 <잃어버린 영혼>의 첫 구절은 그래서 더 아프다. 문장은 이어진다. “오히려 더 잘 살 수 있었습니다. 먹고 자고 일하고 운전하고 … 테니스를 쳤습니다. 다만 가끔 주위가 이상할 정도로 평평한 듯한 기분이 들기는 했습니다.”

시간빈곤에 시달리는 사람은 결국 탈이 난다. 남자는 어느 날 출장길 호텔방에서 숨이 막힐 듯한 통증을 느낀다. 자기가 누군인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의사는 그에게 믿기 어려운 진단을 내렸다. 그가 영혼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주인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영혼은 과거에 머물렀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육체의 속도를 따라잡고 있었다. 의사는 말했다. “환자분은 자기만의 어떤 장소를 찾아 편안히 영혼을 기다려야 합니다. (중략) 제가 드릴 다른 약은 없습니다.”

남자는 영혼을 기다린다. 책은 기다림의 시간을 글로 서술하지 않는다. 그림이 이야기의 여백을 채운다. 어린 영혼이 들렀다 오는 과거의 공간들. 어떤 날의 파티장과 낡은 레스토랑, 겨울의 빈 공원과 스치듯 흘러가는 기차의 풍경들. 책의 왼쪽은 오고 있는 영혼의 공간이고, 오른쪽은 기다리는 남자의 공간이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시간 빈곤에 시달리는 사람은 결국 탈이 난다

인상 깊은 점은 내지의 종이가 주는 질감이다. 낡고 빛바랜 듯한 이 재료는 그림을 그린 요안나 콘세이요가 벼룩시장에서 구한 회계장부의 속지다. 이 때문에 사용 당시의 숫자 스탬프가 찍혀 있고, 반복적인 일의 속성을 보여주듯 가지런하고 일정한 모눈이 그어져 있다. 여기에 연필로 그려진 영혼과 남자의 시간은 낡고 오래된 것들이 품고 있는 편안한 느낌을 배가시킨다.

시간에 쫓겨 반복적인 삶을 살다보면 누구나 공허한 순간들을 마주하게 된다. 어쩌면 틀에 박힌 하루 속에서 영혼을 잃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지쳐버린 나에게, 그리고 답답하고 힘겨웠을 영혼에게 한마디 위로의 말처럼 건네고픈 책이다. 소설 <플라이츠>로 ‘2018 맨부커상’을 수상한 저자는 첫 그림책인 <잃어버린 영혼>으로 ‘2018 볼로냐 라가치상 픽션 부문’과 ‘2018 화이트 레이번즈상’을 수상했다. 오늘은 영혼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책장을 넘겨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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