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기사와 에버초즌의 싸움은 장렬하고, 비극적이었다. 호루스의 발톱은 다시 한번 제국에 패배했다. 위대한 라이온의 부러진 검이 그 저주받은 무기를 팔꿈치부터 잘라버린 것이다. 비틀거리며 물러나는 아바돈은 다른 손에 쥔 드라크니엔을 휘둘러 기사의 머리를 따려했으나, 어느틈엔가 날아온 볼터탄이 워마스터를 좌절시켰다. 터미네이터 아마의 무릎관절을 파고든 신성한 볼터탄은 아바돈의 무릎을 완전히 박살내고, 그의 부서진 꿈과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핏발선 눈으로 무릎 꿇으며, 아바돈은 저주를 토해내며 위를 올려보았다.
후드 아래에서 사이퍼의 눈이 볼터의 총구에서 나오는 포연 사이로 형형이 빛나고 있었다. 그의 굳게 닫혀 있던 입이 열렸다.
"끝났다, 아바돈."
"끝났다고? 내가?"
아바돈은 괴성을 지르며 아직 남아있는 그의 무기를 들어올렸다. 멀고 먼 과거, 저 먼 테라에서 첫번째 살인이 저질러졌을 때 태어났던 오래된 악마, 그 악의의 결정체. 드라크니엔이 포효하며 치솟아올랐다. 사이퍼는 미쳐 피하지 못했으며, 침묵 속에서 그 악마의 검을 바라볼 뿐이었다.
"끝났다고! 내가! 이 내가 말이냐!"
드라크니엔이 내리쳐졌다. 용암같은 피가 사방으로 튀겼다. 피를 뒤집어쓴 사이퍼는 천천히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는, 얼굴에 튄 피를 역겹다는 듯이 닦아냈다.
아바돈은 경악한 얼굴로 자신의 어깨죽지를 내려다보았다. 드라크니엔은, 그의 주인의 적은 가르는 대신, 주인의 어깨를 스스로 절단해버린 것이다. 쏟아지는 출혈 때문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가운데, 아바돈은 어둠 속으로 자신의 잘린 팔이 드라크니엔을 움켜쥔 체, 지네처럼 움직이며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최후의 최후에, 드라크니엔은 결국 아바돈을 배신한 것이다. 그가 자신의 주인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겼기에. 그가 패배했기에.
"그렇다. 끝났다, 아바돈."
아바돈은 절규를 토해냈다.
"나는 워마스터다! 나는 에버초즌이다! 나는 디스포일러다! 나는 카오스의 군주며, 만물의 종결자며, 제국의 심장에 겨눠진 검이다! 그런데 감히! 너 따위가! 이 나에게! 프라이마크들을 무릎 꿇린 내게 끝났다고 말하는 것이냐!"
사이퍼의 바위같던 표정에 경멸이 떠올랐다. 잊혀진 기사는 사자검을 등에 다시 꽂아넣고는 홀스터에 들어있던 예비 볼터를 꺼내들었다. 사이퍼는 두 팔을 잃고 피를 쏟아내는 아바돈에게 담담히 대꾸했다.
"아니다. 너는 그저 배신자일 뿐이다."
아바돈은 핏발선 눈으로 사이퍼를 노려보았다. 살아있는 생물이라면 누구라도 두려움을 느끼며 물러날 증오가 담긴 눈이었지만 사이퍼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네 비열한 아비로부터 훔친 워마스터라는 칭호는 너에게 과분하다, 배신자. 에버초즌? 역겨운 워프신들의 총애를 받았다고 자랑하는 것이냐?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바돈. 워프신의 장기말일 뿐이지. 디스포일러라고? 너는 스스로 외에 그 어떤 것도 모독시키지 못했다. 너는 너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배신자 아바돈."
사이퍼는 낡은 볼터를 워마스터의 이마에 겨누었다.
"그리고 이젠 너는 너조차도 아니게 될 것이다. 너는 머리가 사라진 시체일 뿐이다. 배신자 아바돈."
"크아아아아악!"
어디서 그런 힘이 난 것일까, 온 몸에 남아있는 혈액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도, 아마돈은 이빨을 드러내고 무서운 기세로 사이퍼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귓가에는 이미 그를 버린 카오스신들의 비웃음도, 바람소리도, 폭음도 들리지 않았다. 아바돈은 돌격했다.
그리고 사이퍼는 방아쇠를 당겼다.
'여기가...어디지.'
워마스터, 에버초즌, 디스포일러였던 자가 눈을 떴다. 아바돈은 어리둥절한 심정 속에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된 것일까? 떨어져나갔던 양 팔은 모두 붙어있었다. 심지어, 방금 전까지 선명하게 두개골을 깎아내고 뇌수를 태워버리며 그의 머리를 박살낸 볼터탄이 느껴지는데도, 머리 또한 멀쩡했다. 그가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세시간을 공들여 왁스와 참기름과 고무줄로 정성껏 세우는 야자수 머리 또한 무사했다. 아바돈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워프의 신들께서 내게 기회를 한번 더 주신건가?'
아바돈은 격렬한 증오와 환희 속에서 허공을 향해 포효했다. 그러나 그 포효가 사라지기도 전에, 그는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그가 있는 장소는 뭔가 이상했다. 발 밑에 밟히는 땅은 금속이었다. 은빛으로 빛나는 금속. 드문 드문 서있는 나무들도 금속이었으며, 심지어는 짹짹거리며 날아가는 새들조차도 금속이었다. 금속 외의 물체도 있긴 했으나, 그 소재 또한 기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딘가 찝찝한 빛깔의 그 괴이한 소재는 이쪽저쪽으로 유연하게 휘어지고 있었는데, 곳곳에 구멍이 뚫려 흉칙하기 짝이 없었다.
'이곳은 어디인가? 어느 신의 영역이기에 이리도 괴이하지?'
아바돈은 사방을 정신없이 둘러보았다. 그때, 금속빛의 안개를 뚫고 무언가 끔찍한 형상을 한 것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바돈은 경계를 취하며 무기를 내밀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그는 맨손이었다. 상관없다. 워마스터인 그는 맨손으로라도 타이라니드의 대괴수를 찢어죽일 자신이 있었다. 그는 점점 가까이오는 형체를 향하여 사납게 두손을 내밀었다.
그것은 실로 괴이하게 생긴 존재였다. 높게 솟은 머리볏 주변으로는 싸이킥 에너지처럼 보이는 것이 빠직대고 있었으며, 거대한 머리 아래로는 뱀같은 몸체와 퇴화된 사지가 달라붙어있었다. 아바돈은 경악했다.
'저건...정말로 타이라니드 같은데?'
그것도 아바돈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타이라니드의 괴수처럼 보이는 괴물은 둥실거리며 아바돈에게 떠오더니, 이내 입을 열어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가 신참인가? 젊은이."
"..."
아바돈은 너무 기가 막혀서 말을 내놓지 못했다. 생물체는 공중에 뜬 채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번 신참은 좀 어벙한 모양이군."
"저 새끼가 원래 좀 병신이에요."
그때 또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아바돈은 경악했다. 그 목소리는 분명 얼마 전에 들어본 목소리였다! 카디아를 박살날 때 손수 목을 부러뜨린 자의 목소리 아닌가! 타이라니드의 괴수 뒤로 깃발을 펄럭이며 한 가드맨이 나타났다. 군기담당관 켈이었다!
"너는 분명 내가 죽였을지다!"
"그래 자랑이다 븅신 새끼야. 그렇게 잘난 새끼가 여긴 왜 왔냐?"
쏘아붙이는 가드맨은 유령도, 좀비도 아닌 분명한 인간인 켈이었다. 어떻게 목을 부러뜨려 죽인 놈이 여기에 있는 것일까? 아바돈이 놀라는 가운데 괴이쩍게 생긴 타이라니드의 괴수가 중재하려는듯이 그들의 사이에 섰다.
"자, 자, 진정들하게, 신참들. 어차피 앞으로 같이 지낼 똑같은 처지인데 싸우지들말게."
아무리 당황한 아바돈이라도 이런 모독에는 참을 수 없었다. 그는 화산처럼 고함을 질렀다.
"나는 워마스터, 에버초즌, 디스포일러다! 저딴 나약한 필멸자와 함께 엮지마라!"
타이라니드 괴수는 코웃음을 치더니 공중에서 빙글 돌았다.
"거 거창한 이름이구만. 나는 말란타이의 멸망일세."
"뭐...?"
"자네 거기 계속 그렇게 서있을텐가? 따라오게. 마을을 안내해주지."
"마을이라니?"
"주석촌말일세."
말란타이의 멸망과 켈은 그대로 걷기 시작했고 아바돈은 허둥지둥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뭔가 잘못 굴러가도 한참 잘못굴러가고 있는 것 같았다. 설마, 젠취께서 나를 시험하시는 중 아닐까?
"멈춰라! 프라이마크들을 무릎꿇린 내가 명한다!"
"아, 그러신가. 나는 크래프트월드 하나를 원샷했다네."
켈이 감탄했다.
"거 니드 아재 굉장하신 분이었구만."
"여기선 그래봐야 자네들보다 못한 노모인일세."
아바돈이 빽 고함을 질렀다.
"노모인? 그건 무슨 악마의 이름이냐! 노모자이크? 슬라네쉬의 부하냐!"
말란타이의 멸망은 황당해서인지 웃음을 터뜨렸다.
"누가 에버초즌 아니랄까봐 음탕한 놈이구만. 노모델이란 뜻일세."
이윽고 아바돈의 눈에 모든 것이 괴상한 금속이나 알수없는 소채로 이루어진 마을이 보였다. 마을 입구에 선 금속 표지판에는 각각 주석촌/파캐촌이라는 지명이 쓰여있었다.
"여긴 도대체 어디냐?"
말란타이의 멸망은 친절하게 대답했다.
"신께 간택받지 못한 이들이 거하는 곳이지. 아주 드물게 도로 간택을 받아 새 축복을 입고 나갈수도 있네만 그런 경우는 몹시 드물다네."
"신이라니? 카오스의 신들 말인가? 나는 이미 그분들께 선택받았다! 에버초즌이란 말이다!"
말란타이의 멸망은 뒤로 빙글 돌더니, 연민이 담긴 얼굴로(비록 눈은 없었지만)그를 위로했다. 그 내용은 실로 충격적인 것이어서, 아바돈의 야자수가 꺾일 정도였다.
"그 신은 카오스신 따위와는 비교도 못할 권능을 가지신 분이니 부디 비교하지말게, 신참. 그분의 이름은 플라스틱이시지. 자넨 그 신의 선택을 받기 전엔 여기서 영원히 나갈 수 없다네. 그러고보니, 몇달 전 이곳을 나간 사람이 있긴 했지...말해주게, 자네. 내 아내...아니, 성녀를 본 적 있나? 혹시나 해서 말이지."
아바돈은 기절하고 말았다.
아바돈의 생존을 기원합니다.
혹시 몰라서 다는 전편 링크: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warhammer&no=1533229&page=1&search_pos=-1521101&s_type=search_all&s_keyword=말란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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