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적 리더십이 절실한 시대

이희경 한예종 강사·음악학자
[문화와 삶]수평적 리더십이 절실한 시대

무더운 여름을 더욱 뜨겁게 달궜던 육군대장 부부의 공관병 갑질 사건, 교수의 부당한 횡포에 맞서 집단행동에 나선 학생들 기사를 접하며, 내가 속한 음악계를 돌아본다.

오토바이 길 만든다며 고3 수험생 시켜 산림을 벌목해 고발된 성악가, 제자 폭행과 성추행으로 파면된 교수들, 직원들에게 폭언을 퍼부어 인권침해로 물러난 단체장 등 지난 10년간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것만 떠올려봐도 처참하다. 이들은 자신의 행동이 ‘선의’ 혹은 조직의 발전을 위한 것이었으며 그것이 문제임을 몰랐다고 항변한다. 피해 당사자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나 반성도 없다. 몇달 전 음대 교수들의 환갑 기념 공연과 종교 봉사활동에 학생들이 동원되었다는 기사에서도 교수들은 그것이 학생들의 ‘자발적 참여’였다고 믿고 있었다.

수십년간 도제교육이라는 미명하에 스승에 대한 섬김과 복종을 당연시해 온 음악계에선 부당 행위에 대한 문제제기가 쉽지 않다. 잊을 만하면 불거지는 대학 내 군기 잡기는 잘못된 관행이 젊은 세대에도 여전히 대물림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배움이 일어나야 하는 교육 현장은 갑을 관계로 전락해버렸고, 군림하고 지배하려는 권위주의 문화는 도처에 횡행한다.

2014년 여름 사이먼 래틀이 이끈 ‘루체른 페스티벌 아카데미 오케스트라’ 음악회에 참석했을 때의 일이다. 지휘자가 마주 보이는 무대 옆 좌석에 앉아 있던 내게, 연주가 끝난 후 관객을 뒤로하고 젊은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향해 일일이 눈을 맞추며 격려와 신뢰를 보내는 지휘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루체른 페스티벌은 매해 전 세계 30세 이하 젊은 연주자들을 선발해 3주간 현대 곡을 집중적으로 익히는 아카데미를 운영하며, 이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를 세계적인 지휘자와 함께 무대에 세운다. 어려운 현대 곡들을 기성 오케스트라와는 다른 열정적인 패기와 활력으로 멋지게 소화해 낸 젊은 연주자들을 향해 래틀은 진심 어린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미래를 살아갈 다음 세대에게 필요한 것을 도전하게 만들고 자신의 풍부한 경험을 공유하며 그들이 나아갈 길을 열어주는 것. 그게 ‘사회적 어른’의 몫이 아닐까 생각하게 만든 장면이었다.

사회의 축소판이라 할 오케스트라에서 지휘자의 리더십은 변화하는 시대의 모습을 투영한다. 33년간 베를린 필의 제왕적 존재였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물러나고 1989년 지휘봉을 넘겨받은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압도적인 카리스마 대신 단원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며 민주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리더십을 구축했다. 2002년 부임한 사이먼 래틀은 단원들과 친밀하게 수평적으로 소통하며 베를린 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왔다. 2009년 베네수엘라 출신의 구스타보 두다멜이 28세의 나이로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로 부임한 것은 그가 새로운 시대의 리더십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9년 전 ‘시몬 볼리바르 유스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내한했을 때, 연주가 끝난 후 연단을 내려와 단원들 속에서 그들과 나란히 인사하는 두다멜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지휘자가 오케스트라와 별개의 개체로 여겨지는 시대는 지나갔으며, 지휘자는 오케스트라의 일부이고, 자신도 한 명의 단원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리더는 더 이상 군림하며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 속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존재인 것이다.

인권의식이 부재했던 지난날을 살아온 기성세대는 한국 사회의 오랜 폐습을 청산하자는 시대적 과제 앞에서 혼란스럽다. 상명하복의 수직적 리더십은 과거의 유물이 되었지만, 관행에 젖은 이들은 변화된 현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어른이 아니라 꼰대가 되어간다. 권위는 지위가 아니라 실력과 공정함에서 나오는 것이고, 존경이 뒷받침될 때 큰 힘을 갖는다. 젊은이들의 다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격의 없이 토론하고 공감하는 어른들이 많아지길 바라지만, 반세기 이상 이어져 온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할 터.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권위의식이나 편견은 없는지 살펴야겠다. 나부터 달라져야 세상이 바뀔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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