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취약지 주민의 억울한 죽음

이진석 | 서울대 의대 교수
[정동칼럼]의료취약지 주민의 억울한 죽음

평소 고혈압을 앓던 한 노인이 있다. 어느 날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이 노인이 쓰러졌다면 살아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이 질문에 딱 부러지게 대답하기는 어렵다. 이 노인이 어디에 살고 있느냐에 따라 살아날 가능성은 천양지차이기 때문이다. 질병관리본부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2013년 기준으로 심장마비 환자의 생존율이 0%인 지자체가 60여곳, 전국 지자체의 25%에 이른다. 대부분 농어촌, 도서벽지 등 의료취약지로 분류되는 곳이다. 게다가 이 중 10여곳은 살아서 병원에 도착할 가능성조차 0%였다. 노인이 대도시에 살고 있다면 살아날 가능성은 꽤나 높아진다. 생존율이 높은 대도시 몇몇 지역에서는 심장마비 환자 100명 중 30여명이 살아서 병원에 도착하고, 이 중 절반 정도가 살아서 퇴원한다. 이 정도면 응급의료 선진국에 버금간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어느 전문가는 농반진반으로 “한국에서 병 가진 사람이 살아남으려면 무조건 서울에서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농어촌에 의사가 없고 병원도 연이어 문을 닫아 지역 주민이 의료서비스를 제대로 이용할 수 없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농어촌의 의료 접근성 문제는 의사와 병원이 없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각종 통계에 따르면 농어촌의 의사와 병원은 도시 지역 못지않게 꾸준히 늘고 있다. 증가율은 오히려 도시 지역보다 높다. 이렇게 의사와 병원이 늘어나면서 대부분의 농어촌에서는 고혈압, 감기, 배탈 등 일반적인 진료를 받는 데 큰 지장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심장병, 뇌졸중, 각종 사고 등으로 응급상황이 발생하면 속수무책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농어촌 주민의 의료 불안을 가중시키고, 사는 곳에 따라 생사가 좌우되는 의료 접근성 문제의 실체이다.

농어촌에 병원이 대폭 늘었지만 응급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이유는 기존 병원과 신설 병원 모두 100병상 내외의 중소형이기 때문이다. 이 분야 전문가들은 병원이 300병상 규모는 되어야 각종 응급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진료역량과 체계를 갖출 수 있다고 말한다. 100병상 규모의 병원으로는 상시 인력과 진료체계를 갖추기 힘들고 수지타산도 맞추기 어렵다. 치료 역량도 없으면서 검사만 하다가 골든타임을 놓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농어촌에는 ‘병원’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제 역할을 하는 병원’이 없었던 것이다.

취약지의 의료 접근성이 낮은 것은 대다수 국가들이 겪는 문제이다. 그래서 해법도 웬만큼 확립되어 있다. 첫째는 응급상황에 대한 초기 대응에 자원봉사 인력을 적극 활용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심폐소생술 교육을 몇 시간 받은 인력은 실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거의 없다. 구급팀이 도착하기 전까지 환자를 책임지려면 충분한 교육을 받고, 상시적으로 관리되는 인력이라야 한다. 미국의 일부 주는 이런 인력에게 연금과 세제혜택을 주기도 한다. 그런 만큼 의무와 책임도 크다. 자신이 책임지는 근무시간도 정해져 있다.

둘째는 지역마다 제 역할을 하는 병원을 갖추는 것이다. 초기 단계에 적절한 처치를 할 수 있는 병원을 지정하고 시설, 장비, 인력, 예산을 지원해야 한다. 해당 병원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명확하게 구분한 지침도 필요하다. 그렇게 해야 불필요한 시간 지체 없이 근본적인 치료를 할 수 있는 상급병원으로 환자를 이송할 수 있다.

셋째는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환자 이송체계를 갖추는 것이다. 예컨대 도서산간 지역의 환자 이송에는 헬기가 효과적이다. 우리나라도 이미 여러 대의 구급헬기를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사소한 경증 환자 이송에까지 헬기를 동원하는 경우가 흔하다. 효과적인 수단을 비효율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의료기관 간, 의료인 간의 원격진료도 이송체계의 중요한 요소이다.

최근 취약지의 의료 접근성 개선을 위한 특수 목적의 의과대학 신설 법안이 발의되었다. 의사가 모자라면 의대를 늘릴 수 있고, 의사가 넘치면 의대를 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의대 신설로 취약지의 의료 접근성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응급상황이 발생한 현장에서부터 상급병원에 이르는 의료체계를 정비하는 것이 문제의 해법이다.

단지 사는 곳 때문에 생사가 갈린다면, 이것만큼 억울한 일도 없다. 모든 죽음을 막을 수는 없지만, 억울한 죽음은 막아야 한다. 취약지의 의료 접근성 개선은 억울한 죽음을 막기 위한 우리 사회의 최소한의 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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