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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 추세를 뒤집어라

장덕진 | 서울대 교수·사회학

세 개의 거시 트렌드가 한국의 발목을 잡고 있다. 하나하나가 모두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이지만, 더 고약한 것은 이 세 가지 트렌드가 얽히면서 서로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으면 더 이상의 도약은 어렵고 한국이라는 배는 서서히 침몰할 것으로 보인다. 남은 시간은 길게 잡아도 앞으로 7년 정도, 그러니까 박근혜 정부와 다음 정부까지이다.

[시대의 창]장기 추세를 뒤집어라

세 개의 트렌드란 이중화, 고령화, 현행 민주주의의 한계이다. 이중화란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내부자와 외부자로 구분되어 가는 현상을 말한다.

이중화는 노동시장뿐 아니라 정치적, 문화적, 이념적, 상징적 영역을 모두 포괄한다. 비정규직과 같은 노동시장의 약자들은 정치적으로도 과소대표되고, 문화적으로도 비주류로 취급되며, 이념적으로 발언권이 약하고, 상징적으로 희화화의 대상이 된다.

이중화는 지난 20년간 거의 모든 선진자본주의 사회들이 겪어온 과정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유독 문제가 되는 것은 출발점의 차이와 해결책의 부재 때문이다. 높은 사회적 보호의 수준을 가지고 있던 유럽 사민주의 국가나 조합주의 국가들에서는 이중화가 진행되더라도 견딜 수 없는 정도까지 가려면 아직 여유가 남아있다. 하지만 그들에 비해 몇 분의 일밖에 안되는 사회적 보호 수준을 가진 한국에서 이중화가 진행되면 금방 못 견디겠다는 비명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중화를 추동하는 근본적인 동력은 글로벌리제이션과 기술 변동에 있다. 시장 통합으로 인해 자본은 더 값싼 노동력을 찾아 이동하고 기술 변화로 인해 성장은 고용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중화의 정도와 양상이 나라마다 똑같은 것은 아니다. 합의에 기반한 민주주의 제도를 가진 나라들은 정치적 개입을 통해 이중화를 제어하고 있다. 고령화 또한 세계적인 현상이다. 우리는 주로 고령화의 경제적 결과만을 걱정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심각한 것은 고령화의 정치적 결과들이다. 유권자 고령화가 항상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인구학자들은 신생 민주주의의 경우 유권자 연령이 높은 것이 오히려 민주주의를 지키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본다. 신생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혁명이나 폭동 같은 사건에 젊은 세대가 더 많이 참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주의 공고화 단계에 이르면 사정은 복잡해진다. 고령에 접어들기 이전에 민주주의 공고화와 복지국가를 경험한 고령 유권자들은 민주주의와 복지국가가 좋은 것임을 알고 있고, 다음 세대와의 나눔에 너그러운 자세를 가진다. 반면 고령에 접어들기 이전에 이런 것들을 경험해보지 못한 고령 유권자들은 자기 세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종종 변화와 개혁에 저항하는 유권자가 되는데, 고령화가 진행될수록 점점 이들이 유권자의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선거를 의식해야 하는 정치인들은 감히 변화와 개혁을 추진하지 못하게 된다.

서구의 경험을 보면 이중화와 고령화의 부정적 결과들을 제어하고 통제하는 힘은 결국 정치에서 나온다. 잘 작동하는 합의제 민주주의는 특히 효과적이라는 것이 스웨덴이나 독일 같은 나라들의 경험이다. 그런데 일본이나 한국 같은 나라들의 민주주의 제도는 이중화를 제어할 의지도 능력도 없고, 고령화의 부정적 결과를 예방하기보다는 스스로가 차지한 권력을 재생산하기 위해 고령화를 이용한다. 한국도 이미 유권자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고령 유권자의 표심을 얻지 않고는 집권이 불가능한 상황에 도달했고, 앞으로 이 추세는 더 강화될 것이다.

이중화는 외부자들의 결혼과 출산을 낮추기 때문에 가뜩이나 빠른 고령화의 속도를 더욱 높인다. 고령화는 노인 빈곤을 늘리고 납세자를 줄이기 때문에 이중화를 촉진한다. 이중화는 정치적 대의(代議)의 불평등을 가져오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현행 민주주의는 이중화를 해결할 의지나 역량이 없다. 고령화는 현행 민주주의의 한계를 개선하려는 시도에 저항하고, 현행 민주주의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기보다는 스스로를 재생산하기 위해 고령화를 이용한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의 발목을 잡고 있는 동안 국가는 장기적인 정책과제들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한 채 서서히 침몰한다. 고령화의 속도는 지금도 세계 최고이지만 2020년대 초반이 되면 급격하게 가팔라질 것이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 두 명에 한 명이 노인인 세상에서 사람들은 패닉하기 시작할 것이고 정책수단은 무력화될 것이다. 투자자 패닉이 경제위기를 불러오듯이 유권자 패닉은 정치·사회적 위기를 불러온다. 한국을 침몰시키는 장기 추세를 뒤집어내야 한다. 박근혜 정부와 다음 정부가 해야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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