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200km 대회를 신청하게 된 계기는 순전히 오기였다. 작년 제주100km 대회를 완주하고, 김포공항에서 뒤풀이를 하는 중, 제주바람이 그렇게 센 줄 몰랐다고 하소연을 했다. 200km를 뛴 선배들 왈 “100km 바람은 바람도 아니다, 200km를 뛰지 않고는 말을 하지 말라”

나도 언젠가는 200km를 도전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10여년전 런클토달 뒤풀이에서 풀코스를 안 뛴 사람하고는 밥상을 같이 하지 말아야 한다는 소리에 욱~해서 풀코스에 도전했던 것처럼....

1월초에 제주200km 대회신청과 비행기 티켓 예매를 했다. 1월 홍콩100km 트레일런, 3월 세종울트라, 4월 한국체대 12시간주, 중국 100km 트레일런을 다녀왔다. 중국 대련 산악에서 한밤중 5km 알바를 하고, 72km에서 컷오프를 당하여, 씁쓸함을 맛보았다. 2주뒤에 있는 제주울트라는 다시 낙오하면 안된다는 신념이 두 번째 오기를 만들었다. 어떻게든 완주하고 말리라.

5월 1일 퇴근 후 김포공항. 식사를 하고 대기하고 있었다. 일기예보에서는 제주에 비가 80mm 이상 온다고 한다. 걱정이 커진다.

강남지맹 200km 단체전에서 한분이 100km로 변경해, 내가 200km 단체전으로 투입됐다고 한다 ㅠ. 비행기 안에서 잠깐 숙면을 취했다. 조금이라도 잘 시간이 있다면 자두는게 상책이다. 대회측에서 마련한 숙소에서 여러 명과 합숙을 하게 되면 내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상황에 숙면을 취하기란 쉽지 않다.

제주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9시가 넘었다. 늦어서 오리엔테이션은 참석을 못했고, 배번을 수령하고, 10km~90km까지 내가 원하는 물품을 담아 보관할 수 있었다. 미리 준비해온 파워젤과 캔죽을 40km, 70km에 보관했다. 작년의 경험으로는 식당에서 밥을 사먹는게 수월하지 않았다. 캔죽으로 식사할 요량이다.

여성4명이 배정된 방에 트렁크를 올려다 놓고, 문을 연 식당을 찾아 제주두루치기를 먹었다. 관광으로 왔으면 거나하게 한 잔하고 놀면 좋았을 것을. 양해를 구하고 먼저 일어나 숙소로 돌아와 내일 달릴 준비를 한다. 가방에 판초와 파워젤, 비상금, 신분증을 챙기고, 다리에 꼼꼼히 테이핑을 한다. 100km, 154km에서 환복이 가능하다. 바로 갈아입을 수 있게 옷을 챙겼다.

자정이 가까워진다. 여성선수들은 이미 수면에 들어갔다. 조심스럽게 불을 끄고, 잠을 청하지만 항상 그렇듯이 잠은 오지 않는다. 엎치락뒤치락 하다가 1시 30분경 잠이 들었다. 오전 3시 30분에 알람이 울렸다. 겨우 2시간 잤다. 그래도 눈을 붙였다는 것이 감사하다.

기상하자마자 강남지맹 구춘옥언니와 대회측에서 제공하는 설렁탕을 후다닥 먹고 숙소로 와서 출발 채비를 한다. 이제 트렁크만 맡기고, 탑동공원으로 출발하는 관광버스를 탑승하면 대회준비는 끝이다.

탑동공원에서 화장실을 들리고, 지인들과 사진을 찍었다. 런클의 큰산님이 큰 카메라를 들고 계시는 걸 보니 엄청 반가웠다. 작년 4월, 제주는 강풍에 추웠다. 올해 5월 제주는 안개낀 조용한 바다와 습함이 느껴지지만 따뜻하다.

100km까지는 지난해 달린 경험이 있어 코스나 페이스는 걱정이 없다. 그러나 그 이후가 문제다. 페메(페이스 메이커)를 부탁한 사람들은 페메가 있거나 상황이 안됐다. 100km까지는 어떻게든 가고, 그 이후로는 만나는 ‘달림이’에게 붙을 수 밖에 없는 형편이다. 코스도를 봐도 지리를 모르겠다. 밤길, 산길, 해안길에 홀로 떨어질걸 생각하니 두렵다. 게다가 비까지 온다니 ㅠ.

오전 6시. 대회 출발
우려했던 바람은 없었지만 안개로 인해 시야는 30m 정도에 불과하다. 주위의 풍경은 보이지 않아 섭섭하다. 하지만 풍경이 보이는 해풍과 풍경이 보이지 않는 안개 중 택일해야 한다면 후자인 안개를 택하겠다.

10km까지 다리가 풀리지 않는다. 저벅저벅 달리는 느낌이다. 그동안 뛴 것은 100km 위주다. 200km는 처음이다. 그래 여기를 풀코스대회로 생각하자. 100km는 무난하게 가니까 거기까지는 풀코스의 하프로 생각하자. 그리고 다시 하프코스를 달린다고 생각하자. 나는 나에게 주문을 건다.

9시가 넘으니 해가 뜬다. 비 예보가 있어서 흐릴줄 알았고, 고글도 안챙겨 왔는데 해가 작렬한다. 몸의 흐름이 즐겁게 뛰어지기도 하고, 힘겨운 구간이 생기기도 한다. 32km쯤 달려가면서 힘겹다는 생각이 든다. ‘풀코스도 마의 32km라고 하지 않았나’ 하며 달렸다.

주로에 뭔가 놓여져 있다. 처음에는 쓰레기 흘린거라고 생각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노란 고양이가 쓰러져 있다. 죽은 듯 하다. 어찌 해야 될 바를 모르겠다. 집에 있는 고양이들이 생각나면서 흑흑 울음이 터졌다. 외상은 없는데 왜 길에 죽어 있는지 그 영혼이 너무 불쌍해서 한참을 걸으며 속이 상해서 울면서 걸어갔다. 진이 빠지는 듯 하다.

오전 10시 26분 40km 통과 (소요시간 4시간 26분)
10km 구간마다 정제염과 파워젤을 먹는다. 배고프지 않도록 미리 먹고, CP에서 제공하는 음료와 과일을 양껏 섭취했다. 40km 지점에 맡겨놓은 캔죽을 주저앉아 열심히 먹는다. 제주대회는 식사를 제공하지 않는다. 주자가 알아서 사먹던지 스스로 챙겨야 한다. 올해는 식당에서 시간을 지체하지 않기로 했다. 먹자마자 물통에 물을 채우고 바로 출발한다. 46km지점 한경해안도로. 작년에 미칠 듯한 바람과 파도와 풍차의 굉음으로 나를 울게 만든 그곳이 보인다.

지난해 쓴 100km 대회 참가 후기다.
“파도는 삼킬듯이 치고, 거대한 풍차들은 긴 팔을 돌리며 굉음을 내고, 바람은 내 몸 구석구석을 쳐댔다. 눈을 뜰 수가 없다. 바람이 미쳤다. 귀에서는 바람이 아우성을 친다. 이 악조건에 나는 왜, 여기서 왜, 무엇 때문에, 뭐하러 왔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돌아가는 꼬라지가 내가 처한 삶의 현실같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바람도 울고 나도 울었다. 징징 울었다. 눈물을 흘리니 마음이 정화가 되는것 같다. 악으로, 깡으로, 오기로 끝까지 가자는 다짐이 생겼다. 어떻게서든 끝까지 완주하리라. 박현자 끝까지 가자. 할 수 있다. 완주하자”

힘들게 울면서 지나간 곳, 내 현실을 바람에 실어 울음을 터뜨린 곳... 지난해 내가 처해있던 난관을 생각해 보았다.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좋은쪽으로 향상되었고, 희망이 보이고 있다. 그때 나는 현실에 당혹해 했다. 어찌할 줄 몰라 힘들었다. 1년이 지났다. 되돌아 보니 삶은 나아지고 있다. 왜 그렇게 힘들어 했을까. 지금 또 다른 난제들이 없지는 않지만 거기에 머물러 있다면 나는 계속 힘들어 할 것이다. 풍차의 굉음이 그때는 마귀소음처럼 들렸는데, 올해는 그저 풍차소리로 들린다. 시간은 난제들을 해결해 줄 것이다. 나는 좀더 긍정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살기로 한다. 뛰면서 생각했다.

오전 11시 34분 50km 통과 (소요시간 5시간 34분)
해안가를 돌아 멀리 50km CP가 보인다. 작년에는 그곳을 골인하는 50km 주자들이 무지 부러웠다. 지금은 그런 마음은 안든다. 아직 50km의 3배나 가는 거리를 달려가야 하기에 마음에 계속 인지를 시킨다. 골인 아치에 다가가니 큰산님께서 사진을 찍고 계신다. 힘이 난다. 물집이 느껴진다. 100km 까지 참고 가기로 한다. 펀드장 장세현님의 파스를 바르고 바로 출발했다. .

53km 지점, 작년에 이용한 식당이 보인다. 혼자 찾아 들어간 식당. 식탁에도 못앉게 했다. 카운터 옆에 상자를 쌓아 앉게 했었다. 이번에는 찬밥 신세와 지연되는 식사를 하지 않기로 하고 그냥 지나쳤다. 캔죽을 이미 먹어 배는 고프지 않은데 갈증이 난다. 편의점이 보여 캔맥주를 사러 들어가려는데, 맞은편에서 제주런클 자봉단이 식사를 한다. ‘달려야하니님’ 부인인 ‘준이사랑님’이 식사 하라고 부른다. 오메 감사한거. 배고프지 않았지만 곡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된장국에 한사발 말아먹고 감사 인사를 드리고 바로 출발한다.

오후 1시 60km 통과 (소요시간 7시간)
CP에 도착해서 바나나, 오렌지를 흡입한다. 옆에 계신 주자님, 숙소에서 잠을 못잤다고 한숨을 푹푹 쉬신다. 달리는 중에 그분과 자주 앞서거니, 뒷서거니 한다. 작년 한반도횡단 완주 후 상경버스를 나랑 같이 타셨다고 한다. 지난밤 숙소에서 밤 10시에 소등을 했는데, 4명 중 1명이 머리를 바닥에 대자마자 코를 골기 시작해서 잠을 못잤다고 한다. 계속 뒤척이는데 또 한사람이 잠꼬대를 “불 싸지르란 말이야~~!” 하면서 소리를 질러서 다 깼다고 한다. 좀 있다가 잠꼬대 하신 분은 앉아서 졸고 있더란다. 달리면서 얼마나 웃었는지 배가 아플 정도로 웃었다. 막상 잠이 들려고 하니, 그분들은 일어나 달릴 준비를 해서 또 못 잤다는 것이다. 버스정류장이 나올 때마다 그분은 누웠다가 다시 달리다가 하는 모습을 보니 안스러웠다. 대회를 앞두고, 잘 자고, 잘 먹고, 잘 싸는 것도 복이란 생각이 든다.

오후 2시 28분 70km 통과 (소요시간 8시간 48분)
멀리 산방산이 보인다. 정말 저기까지 가야 하는거지? 암만. 작년에는 바람이 세서 밭의 흙이 바람막이 모자를 때리고, 왼발이 오른발을 쳤다. 올해는 감사하게도 바람은 그닥 세지 않았다. 다만 머리위로 햇빛이 쏟아진다. 산방산이 가까울수록 고도가 높아진다. 좀 걷기로 한다. 이즈음에 80CP가 있었는데 기대심리를 갖고 뛰다가 정작 그 CP가 안나오면 좌절한다. 다행히 연맹 이범식 선배님께서 80CP는 산방산 넘어 산 아래에 있다고 알려주신다. 82km 정도에 위치하고 있다. 과일을 열심히 먹고 다시 달린다.

작년에 90CP까지 가기가 상당히 배고파서, 주자에게 먹거리를 얻어 먹은 기억이 난다. 산방산을 지나니 계속 내리막이다. 신나게 달려 내려갔다. 어떻게든 100km까지 가서 환복, 식사후 154km에서 좀 쉴 요량으로 힘을 냈다. 나에게는 1척의 배도 없다. 페이스메이커. ㅠㅠ 뛰다가 흔드는 손을 보니 오른손보다 왼손이 좀 부어있다. 왜 손이 붓는지 모르겠다. 땀이 많아 1시간마다 먹는 정제염 때문에? 해풍 때문에? 90km에서 100km까지 월드컵경기장이 보일 것 같으면서도 잡히지 않는 지루함이 지속되었다. 초조하면 나만 힘들어진다. 달리다 보면 갑자기 나타나는 CP처럼 서서히 진행하기로 한다. 비가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한다.

▲ 100km 골인,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오후 6시 56분 100km 통과 (소요시간 12시간 56분)
드디어 월드컵경기장으로 골인한다. 큰산님이 사진을 찍어주신다. 100km 개인기록을 12시간 56분으로 경신했다. 내가 봐도 신기했다. 이렇게 빨리 들어오다니. 부스에 들어가니 사람들이 놀랜다. 80km 트레일런에서 넘어져 부상으로 접은 구춘옥언니, 정해상님, 조의승님께서 식사와 여러 가지를 도와주고 챙겨주신다. 넘 감사했다.

설렁탕국수를 먹는데 조의승님께서 125km에서 개조심을 하라고 하신다. 밥을 뿜을뻔 했다. 아마 1등 주자가 물린 모양이다. 식사 후 펀드장 장세현님께서 발냄새를 마다하시고 물집 치료를 정성스럽게 해줬다. 감동이다. 박복진님께서 옆에서 후레쉬로 물집을 비쳐주며 “할 수 있다”고 격려해 주신다. “저는 끝까지 갈겁니다, 끝까지 완주해야 합니다”

날은 어두워지고, 비는 더 쏟아진다. 선배님들이. 비에 어차피 다 젖으므로 신발은 물론 환복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페메를 해주실 분을 찾았지만 여의치 않다. 판초우의를 입고 길을 다시 나선다. 어디로 향해야 되는지 모르겠다. 두렵다. 하지만 나아갈 것이다. 주로 표시를 확인하면서 가는데, 여러 갈래 길에서는 어디가 주로인지 모르겠다. 서성이면서 주로표시를 찾는데 10여분이 걸린다. 도저히 안되겠다. 앞으로 전진해서 길을 아는 주자를 만나야만 한다.

105km쯤에서 ‘나이스가이’ 이영환님이 엄한 방향에서 내려온다. 먼저 출발했는데 왜 여기 있느냐고 하니 알바를 했단다. 같이 달렸다. 나이스가이님 많이 힘들어 한다. 포기하고 싶어 하는 내색이 역력하다. 나는 안된다고 하였다. 우리는 단체전에 끼었을뿐 아니라 끝까지 완주해야 한다고 압력을 가했다. 잘뛰는 오빠가 무슨 엄살? 자꾸 뒤로 쳐지는 나이스가이님에게 따라오라고 하고 마구 달렸다.

오후 9시 38분 112km 통과 (소요시간 15시간 38분)
이미 도로는 물로 넘치고 신발은 푹푹 빠져 다 젖었다. 비를 맞고 달리는 걸 염려했는데, 웬걸... 기분이 너무 좋다. 전에 이런 적이 있었던가 생각을 해보니, 2006년 인천런클의 감사님이 진행한 ‘한여름밤의 야반도주’가 생각이 났다. 그때 우리만의 울트라로 장마철에 달리곤 했었지. 그 경험이 여기서 도움이 되었다.

앞서가는 주자가 보인다. 얼른 달려가 내 소개를 했다. 제주런클 ‘새벽안개’ 송창길님 이시란다. 여기서 제주 런클분을 만나다니. 너무 반가웠고, 제바라 나를 놓고 가지 말라고 부탁 드렸다. 새벽안개님은 그 뒤로 골인때까지 나를 인도했고, 멋있게 완주를 시켜주셨다.

비는 우비속에서, 땀과 범벅이 되어 흘러 내렸다. 침수된 도로에 발은 빠지고 과속하며 지나가는 차량은 위험했다. 하지만 달리기를 멈출 수는 없다. 제한시간이 걸려있는 154km까지 열심히 달려가자. 쉬더라도 그곳에서 쉬자.

오후 10시 40분 120km 통과 (소요시간 16시간 40분)
비가 겁나게 쏟아진다. 120CP에서 자봉하시는 분이 안쓰럽다. 먹거리위로 비가 떨어진다. 바나나, 오렌지를 먹고 다시 출발한다. 뛰다보니 나이스가이님이 쫓아왔다. 잘달리는 사람이라 거뜬히 쫓아올 줄 알았다. 먼저 가서 154km에서 식사를 하고 잠을 자라고 했다. 그뒤로 나이스가이님과 앞서거니뒷서거니 했다. 화장실을 자주 가는 내가 “화장실이 있으면 알려주세요” 하면 바로 찾아내 안내를 해주고 나올 때 까지 기다려주곤 했다. 정말 감사했다.

발목이 아파왔다. 전에 이쪽은 통증이 없었는데, 엄한데서 부상이 찾아온다. 그래도 참고 가련다. 가족 단체 카톡에 어디쯤 달리는지 km수를 숫자로 보냈는데, 여기까지만 적었고 그다음부터는 그것도 힘에 부쳐 카톡을 날리지 못했다. 130km쯤에서 핸드폰에서 요상한 사이렌이 몇 번 울린다. 나중에 보니 제주 호우주의보 재난문자였다. 하필 울트라 하는날 폭우가 쏟아지다니.

140km에는 콜라만이 비를 맞고 있었고, 자봉자는 없었다. 콜라 한모금을 마시고 다시 달린다. 주자들이 몇 명 앞서거니 뒷서거니 달린다. 여기서 154km 식당까지, 14km가 얼마나 길던지... 아... 쉬고 싶다. 더해지는 발목 통증은 찔끔찔끔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식당에 도착하니 여러 주자들이 잠을 자고 있었다. 그 와중에 코를 고는 사람도 있다. 화장실에 가서 수돗물로 신발에 있는 이물질을 헹궈냈다. 세수를 했다. 미역국을 먹었다. 펀드장님께 어리광을 부렸다. “발목이 아프고 부어서 더 이상 못갈 것 같다” 펀드장님은 “여기까지 왔는데 그만두면 아까워서 안되지“ 하면서 약을 발라주셨다.

아뿔싸, 타이즈를 걷어 올리고, 양말을 벗으니 칭칭 감은 테이핑이 물처럼 흘러내린다. 비에 젖은 테이핑은 역할을 못한다. 빗속에 첨벙첨벙, 발목이 충격을 다 감당하고 있었던게다. 진통제를 몇알 얻어 챙겼다.

따뜻한 식당방, 주자들 옆에 끼어 30분간 눈을 붙였다. 주섬주섬 일어나 갈 채비를 하는데, 사람들이 내 얼굴이 부었다고 한다. 내 런클모자도 없어졌다. 모자를 찾는데 20분은 허비했나보다. 나중에 보니 나이스가이님이 본인 모자인줄 알고 챙긴 거였다. 모자에 적힌 이름을 보고 공항에서 돌려주었다. 할 수 없이 연맹 이은주언니의 성지순례모자를 빌려 쓰고 나갔다. 이제는 추위와 강풍이 엄습한다. 근처 편의점서 우비를 사서 판초위에 덧입으니 추위가 가신다. 아픈 발목을 살살 달래가며 달린다. 해안가를 한참 돌고 돌아 다음 CP는 160km에 있을거란 기대를 했다. 가도가도 나오지 않는 CP. 이은주언니에게 전화를 하니 다음 CP는 170km란다. 구간중 가장 지루하고 힘들었던, 남은 구간 40km. 발목은 부상이 왔고, 몸은 지쳐간다. 발목만 괜찮으면 달려 나갈 것을... 수시로 파워젤을 물었다, 살기 위해서. 진통제를 먹었다, 고통을 이기기 위해.

164km 지점쯤일까. 전화가 오는걸 못받았는데 박복진 선배님이시다. 박복진님의 장문의 문자를 보는 순간 흑흑하고 울기 시작했다. 이대로 걸어가다가는 완주도 못하고, 시간외로 들어갈 것인가 고민하던 차에 그 문자를 보니 울컥해졌다. 우는 와중에 홍콩, 중국 트레일런을 같이 간 채흥기 선배님이 전화를 주셨다. 어디쯤인가 물으시는데, 옆으로 이도희 조직위원장님 감독차량이 지나가신다. 통화중 엉엉 울면서 더 이상 힘들어서 못갈거 같다, 나는 너무 힘들다, 발목도 아프고 그냥 포기해야 할거 같다고 했다. 채선배님은 할 수 있다며 필요한게 뭐가 있는지 곧 갈테니 포기하지 말고 살살 뛰라고 하신다. 울고 나니 의욕이 살아났다.

다음날 오전 9시 26분 176km 통과 (소요시간 27시간 26분)
구름이 걷히고, 해가 작렬한다. 모자를 안빌려 왔으면 큰일날뻔 했다. 사실 발목이 아픈 상태에서 40여km를 달린다는건 무식한 일이다. 154km 식당에서 포기한 주자들이 많았다. 어쩌면 그들이 현명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시간당 6km 정도는 달려줘야 안정권에 들어가는데, 5km도 힘들었다.

새벽안개 송창길님은 제주지맹 선배이다. 힘들어 하는 나를 잘 다스려 가면서 이끌어 주셨다. 달리는 도중 수도가 나오면 알려줬다. 찬물로 정강이부터 발목, 신발까지 다스렸다. 멀리서 스쿠터를 탄 채흥기 선배님이 오셔서 음료수랑 약이랑 챙겨주신다. 할 수 있다고 격려해주시고, 앞서 가서 필요한 것들을 챙겨 주셨다. 붙이는 파스도 사다 나르고, 아이스크림도 사다 나르고, 얼음대야물에 발을 담그게 준비해 주셔서 몇 키로를 편안히 갈 수 있게 해주셨다. 정말 황송한 대접이다. 제주런클님들도 차로 다니시면서 콜라, 바나나, 바세린 등을 챙겨주셨다. 내가 페메를 정말 잘 만난거다. 런클, 연맹 선배로서, 지리를 잘 아는 분을 만났다는건 큰 행운이었다.

▲ 180km지점, 발목 부상으로 인한 인상쓴 얼굴, 골인은 할 수 있을지의 상념

마지막 CP 194km 지점이다. 계산상 6km가 남아야 정상인데, 부스에는 남은거리가 10km로 되어 있다. 제주대회는 200km가 아니라 제주일주로서 204km에 해당된다. 한숨을 내쉬고 다시 골인점을 향해간다. 뛰다 걷다를 반복하며 나는 계속 두려움에 잡혀 있었다. 이러다가 제한시간 안에 완주 못하면 어쩌지. 그 생각이 나를 계속 괴롭혀서 지원차량을 봐도, 스쿠터를 탄 선배를 봐도 내 얼굴의 인상을 숨길수가 없었다. 채선배님은 지금부터는 걸어가도 시간이 충분하니 즐기면서 가라고 하신다. 아뿔싸. 내가 여기에 즐기러 왔지. 울러 왔는가. 고통스러움에서 벗어나자고 다짐하였는데, 아픈 발목이 나를 붙잡는다. 이제 4km가 남았다. 제주시내를 통과해서 탑동공원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1km를 앞두고 경기지맹 이석병님이 음료수를 챙겨주신다. 골인하고 나면 경황이 없을 것 같아 페메를 해주신 송창길 선배님께 미리 인사를 드렸다. 챙겨주시고, 완주할 수 있게 리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은 골인해서 같이 손잡고 사진을 찍자고 하셨다.

▲ 스크터를 대여해서 30키로를 조력해 주신 채흥기 선배님(80트레일런 완주)

다음날 오후 2시 200km 통과 (소요시간 32시간 34초)
작년 200km 골인하는 주자들을 보면서, 저분들은 어디를 어떻게 통과해서 이쪽으로 골인하는 걸까 궁금해 했었다. 올해는 내가 그 주로로 들어와 골인을 했다. 선배님과 만세를 부르며 사진을 찍었다. 사회자분께서 골인해서 왜 안우냐고 마이크를 주신다. “주로에서 다 울어서 골인해서 눈물이 안납니다. 자봉해 주신 선배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드디어 200km의 막이 내렸다. 골인해서 눈물이 날 줄 알았는데, 막상 덤덤했다. 200km 여성주자는 2명만 골인했다. 내가 2등이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네. 경북지맹 공종숙언니랑 시상대에 올랐다. 고통스러웠던 기억들은 싹 사라지고, 완주했다는 기쁨이 나를 안도하게 만들었다. 박현자~ 잘했어~~~화이팅~!

원문 하니 박현자 울트라마라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