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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ders] 문화CEO 박영주 메세나협회장 (이건산업 회장)

입력 : 
2010-11-19 15:00:18
수정 : 
2012-01-26 10: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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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더 벌면 문화사업?…그러다간 평생 못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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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인천에 자리 잡은 이건창호 합판공장에서는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시골 공장 음악회의 초대 손님은 체코 아카데미아 목관 5중주단. 외국 클래식 연주단을 초청한다는 소식을 듣자 주변에선 다들 펄쩍 뛰었다. "우리 수준에 무슨 클래식이냐, 트로트 가수나 부르지"라는 푸념이었다. 하지만 플루트 오보에 클라리넷 바순 호른의 영롱한 선율은 투박한 공장 노동자들의 마음을 이내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감동을 받은 직원들과 가족들의 박수에 힘을 얻어 이 음악회는 20년 동안 이어졌다. 헝가리 금관 5중주단, 다르장 플루트 3중주단, 웬델부르니어스 재즈밴드, 폴란드 체임버 싱어스, 로드 아일랜드 색소폰 4중주단, 체코 프라자 크 현악4중주단, 독일 무지카 안티쿠아 쾰른 등이 소개됐다.

처음엔 수십 명 남짓한 회사 식구들을 위하던 공연이 이제는 서울과 지방 각지를 도는 음악회로 성장해 10만명이 넘는 관객이 찾은 음악회가 됐다. IMF 외환위기 당시 회사가 어려워지자 그만두자는 얘기부터 나왔지만 결코 음악회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올해 제21회 음악회도 지난달 서울과 부산 등 5개 도시에서 체코 베네비츠 콰르텟 현악 4중주단을 초청해 열렸다.

박영주 이건산업 회장(69)은 전 세계 오지에서 해외조림사업을 펼쳐 '솔로몬군도 추장'이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이제는 '문화 CEO'의 상징으로 통한다. 박 회장은 5년 전부터 한국메세나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다. 문화예술 지원을 통한 사회공헌에 뜻을 같이하는 200여 개 기업이 참여하고 있다. 문화적으로 소외된 계층을 대상으로 문화체험 기회를 제공하고 아이들에게 미술, 연극, 음악과 같은 문화교육 기회도 열어주는 것이다.

메세나(문화예술지원)에 오래전부터 많은 관심을 가진 그였지만 처음엔 이 자리가 부담스러웠다고 한다.

"처음에는 이 자리를 몇 번 거절하기도 했어요. 전임 회장이셨던 고 박성용 금호아시아나그룹 명예회장님보다 부족하다는 생각도 들고, 이런 자리는 좀 더 큰 회사가 맡아야 하는 게 아닌가도 싶었죠. 그래도 평소에 관심이 있었던 일을 통해 사회에 봉사할 기회를 얻었다는 생각에서 받아들였죠."

문화CEO에게 이 자리는 어쩌면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시 문화예술지원을 통한 기업의 사회공헌활동(CSR)이 보편적이진 않았다. 일부 기업만 호기 좋게 큰돈을 문화예술행사에 후원하고, 대형 작가에게 스폰서십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많았다. 하지만 1등이 아닌 문화단체에 대한 지원이나 메세나에 대한 중소기업의 참여는 부족했던 것이다.

◆ 중소기업도 참여할 수 있는 메세나 길 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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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세나협의회에 몸을 담은 후 2006년 기업과 예술단체를 1대1로 파트너십을 맺는 '기업과 예술의 만남'을 시작했다. 첫해에 13쌍의 기업과 예술단체 커플이 탄생했다. 5년이 지난 올해 이 결연은 중소기업 50개를 비롯해 73쌍으로 대폭 늘어났다. 이 같은 활동을 통해 얻은 효과는 유형보다 무형적인 측면이 더 크다. 그전까지 기업의 후원을 통해 소외지역을 찾아가는 문화예술활동은 상당히 미미했다. 기업들의 CSR 차원에서 문화사업을 설득해나간 것이 그때부터다. 점차 문화를 통한 사회공헌을 CSR의 새로운 축으로 인식하기 시작했고 한국에서도 메세나활동의 틀이 잡히기 시작했다.

강원도 폐광 지역에 사는 시골 분교 아이들이 바이올린을 만져보고, 배울 기회가 '기업과 예술의 만남'을 통해 가능해졌다. 편부모 가정의 아이들 수백 명이 지역아동센터에서 마음 편히 공부하고, 미술과 음악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도 이를 통해 가능했다.

처음에는 찾아가는 공연과 예술 교육 프로그램에 관해 문의하던 많은 기업은 이제 자체적인 문화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내며 '진화'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기업들의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지원은 문화예술 발전에 없어서는 안 될 자양분"이라면서 "문화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 기업들과 문화예술계의 상생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그가 재임하면서 이룬 또 다른 성과는 기업과 예술의 만남 사업을 중소기업으로 확대하는 '중소기업 예술지원 매칭펀드'를 이끌어낸 것이다. 2007년부터 시작된 이 사업은 중소기업이 예술지원 매칭펀드를 통해 예술단체를 지원하면 그 금액에 비례해 예술단체에 추가로 국고에서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를 통해 각각 50개 중소기업과 소규모 예술단체가 메세나 활동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금액으로도 44억원이 예술단체에 지원되기에 이르렀다. 박 회장은 "정말로 지원을 필요로 하는 소규모 예술단체 책임자들이 기업과의 결연을 요청하지만 대기업과 매칭이 안 되는 경우가 있어 안타까웠다"며 "그래서 고민 끝에 생각해 낸 방안이 중소기업과 예술단체의 결연이었다"고 말했다.

소규모 예술단체에 지원되는 몇 천만원은 어떤 측면에서는 액수가 적다고도 볼 수 있지만 그 단체가 활동을 계속할 수 있는 소중한 영양분이 될 수 있는 금액이다.

이건산업 회장으로 이 자리에 오르면서 그가 가장 고민한 것 또한 중소기업의 메세나활동 진작이었다.

"20년 전 이건음악회를 시작하던 당시, 저희도 중소기업이었죠. 하지만 큰 수익을 내야만 문화활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지는 않았어요. '더 벌면 해야지'라는 마음가짐으론 결코 메세나활동을 할 수가 없어요. 45년간 기업을 이끌면서도 여유로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가진 예산에서 일정액을 정해놓고 시작했던 것이 지금에 이르게 했죠."

◆ 기업에도 문화예술은 꼭 필요한 자양분

= 그에게 문화예술은 기업 경영에 없어서는 안 될 가치다. 기업이 메세나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게 되면 직원들도 그만큼 자부심을 느낄 뿐만 아니라 예술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라는 것. 박 회장은 "기업의 예술단체 지원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며 서로가 도움을 얻는 '윈-윈'"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업이 예술단체를 돕는 만큼 거꾸로 예술단체의 직접적인 도움을 받는 기업도 적지 않다고 강조한다.

그는 "창조경영, 감성경영을 강조하는 기업이라면 예술단체를 돕는 과정에서 기업들도 영감을 얻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일례로 이건창호는 무용단체와 자매결연을 했는데, 이를 계기로 무용이 무엇인지, 그리고 몸의 움직임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된다면 직원들의 사고 폭이 얼마나 유연해지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회사 경영에 있어서도 문화나눔을 좀 더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이건산업은 내년부터 부산소년의집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해마다 일정 인원을 받아들여 직장오케스트라를 만들기로 하고 세부사항을 조율하고 있다. 이는 이건음악회 21년의 결실을 보는 일이자 근로자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예술을 경영에 접목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 법과 제도로 문화기부 뿌리내려야

= 메세나협의회 회장으로서 남은 임기에 그가 가장 공을 들이고 있는 것은 '메세나활동 지원 특별법'의 안착이다. 우리나라는 기업의 문화예술 기부금에 대한 실질적인 혜택이 미약해 메세나 활동의 폭이 아직 좁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한국메세나협의회는 기업의 예술기부금, 문화예술을 활용한 교육비 등에 대한 세액공제, 문화예술 비영리법인에 대한 지방세 감면 등을 내용으로 하는 법안을 준비해 지난해 11월 국회의원 31명의 서명으로 발의했으나 현재 국회에서 계류 중이다. 박 회장은 "프랑스에서는 법이 제정된 후 지원이 급격히 늘어났다"면서 "지난해 조사한 바에 따르면 기업 중 20% 이상은 법이 제정되면 지원을 확대할 의사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프랑스에서는 2003년 메세나법 도입 이후 기부금이 2002년 3억4000유로에서 2005년 10억유로로 3배가량 증가했다.

"진정한 선진국이 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바로 문화의 힘입니다. 우리 문화예술의 힘을 더욱 키우기 위해서는 정책적인 지원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는 "이제 먹고사는 것을 걱정할 때가 아니라 모든 아이가 문화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고 풍부한 문화적 자본 안에서 자랄 수 있도록 미래를 위해 투자해야 한다"고 말했다.

메세나협의회 회장으로 박 회장의 남은 임기는 2년여다. 마지막 바람을 이루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남아 있다. "소박한 바람은 더 많은 기업이 메세나 활동에 동참하고, 국민도 기업들의 문화예술 투자를 호의적으로 격려해 주셨으면 합니다."

■ 음악 미술 무용 사진…전문가수준 식견

'문화CEO' 박영주 회장의 지금을 있게 한 것은 어린 시절부터 접했던 예술이었다. 누이들이 그림을 그릴 때 함께 배웠고, 어릴 적부터 피아노와 가야금까지 배워온 그에게 예술은 주변에서 늘 있어온 '공기'와 같은 것이었다.

"딸과 며느리, 조카도 모두 예술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어요. 딸은 지금 오스트리아 빈에서 그래픽디자인 일을 하고 있고, 조카도 독일 쾰른지역 방송교향악단에서 퍼스트 첼리스트로 있어요. 큰누나의 큰아들이 음악인 한대수입니다."

경영인으로서 바쁜 와중에도 그는 예술과 거리를 두지 않았다.

음악, 미술, 무용, 문학, 사진 등 다방면에 걸쳐 전문가 수준의 식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주변의 평가다. 이건산업 서울사무소가 있는 서울 목동의 집무실 한쪽 벽에는 예술 관련 책들이 가득 꽂혀 있다. 판화 작품의 경우는 애착이 각별해서 수집을 하기 시작한 지 20여 년 됐다.

지난해 매경이코노미 주최 '명품 CEO 소장품전'에 서울대 미대 명예교수이며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윤명로 작가의 '숨결 Anima' 연작을 내놓기도 했다. 은퇴하면 직접 판화작업도 해볼 생각이다. 그는 "판화는 다른 미술품에 비해 비교적 저렴해 쉽게 접하고 즐길 수 있다"며 "판화를 모으면서 미술을 공부하게 됐고 문화를 보는 안목도 높아지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이미 전시관을 열어도 될 만큼 많은 판화를 수집했지만 힘 닿는 대로 계속 모을 예정"이라며 "장차 큰 미술관에 기증하거나 전시관을 열어 일반에 공개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와인에도 조예가 깊다. 부회장으로 있는 전경련 회장단에서도 '와인에 가장 조예가 깊은 오너'로 통한다. 칠레 와인이 국내에서 인기를 끌기 전인 1980년대에 이미 칠레 와인을 들여온 주인공이기도 하다.

기업과 메세나협의회 회장 외에도 전경련 부회장, 솔로몬아일랜드 명예영사 등 직함을 갖고 활동하고 있는 체력의 비결은 꾸준한 운동이다.

이런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그의 건강 비결은 수십 년째 하루도 거르지 않는 운동. 주로 외부인과의 저녁식사 약속이 있기 전에 좀 일찍 가서 한 시간 정도 수영을 하거나 러닝머신에서 걷는 운동을 해오고 있다. 박 회장은 1998년, 2001년 각각 솔로몬군도 정부와 칠레 정부로부터 최고훈장을 받았다. 한편 2005년에는 독일 몽블랑문화재단이 문화 경영을 선구적으로 실천해 온 메세나 인사에게 수여하는 '몽블랑 예술후원자상'을 수상했다.

주말에는 금실 좋기로 소문난 부인과 함께 청운동 집에서 삼청동까지 걸어와 주변의 미술관, 박물관 등을 둘러보며 차 마시는 것을 즐긴다. 어떤 때는 인사동까지 내려오기도 하고, 광화문 쪽으로 발길을 잡은 날에는 시립박물관이나 역사박물관에도 들르곤 한다.

타고 다니는 차도 항상 국산차를 고집한다. "권위적으로 보인다"는 이유로 검은색 차량을 굳이 외면하고 밝은 색 차를 타고 다닌다.

변화나 새로운 것들에 대한 관심이 굉장히 많은 편이다.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일찌감치 써왔을 정도로 얼리어답터이기도 하다. 이 같은 호기심과 유연한 사고는 회사 운영에도 나타난다. 본인이 칭찬할 직원이 있으면 직접 메일을 쓴다. 이를 받은 직원들이 오히려 깜짝 놀라는 일이 일어난다. 또 수십 년을 만난 지인이나 직원들에게도 결코 반말을 하는 법이 없다.

■ 박영주 회장은

△1941년 부산 출생 △1959년 경기고 졸업 △1963년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1975년 광명목재 대표이사 △1978년 이건산업 대표이사 △1988년 이건창호시스템 대표이사 △1989년 이건재단 설립 △1993년 이건산업 대표이사 회장(현) △솔로몬아일랜드 명예영사(현) △세계임업협회(WFC) 회장 △아ㆍ태삼림기구(APTO) 회장ㆍ이사(현) △2001년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현) △2005년 한국메세나협의회 회장(현) △2006년 포스코 이사회 의장

[김슬기 기자 / 사진 = 김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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