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읽고 전시회 초대권 받자!
기고

예의를 팽개친 ‘갑’… 당당함을 잃은 ‘을’

박해진 | 도서출판 학고재 대표

갑의 횡포와 을의 분노 속에 한 해가 저문다. 갑에게 뉘우침과 깨달음을 촉구하는 격앙된 목소리들은 이미 높으나 실효를 거두기 어렵다고 본다. 을의 변화가 세상을 바꾸는 동력이 될 것이다. 그것이 민주주의가 자라온 역사이기도 하다. 을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분노하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기고]예의를 팽개친 ‘갑’… 당당함을 잃은 ‘을’

갑과 을의 관계는 수평적이고 쌍무적이다. 공허하게 들리지만, 법이 그렇고 원칙이 그렇다. 하지만 갑은 예의를 팽개쳤고 을은 당당함을 잃었다. 기업은 예의를 버려서 단기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지만, 이는 공동체를 약화시키고 기업 자신의 생존기반도 무너뜨리는 행위다. 그래서 공동체 질서를 보장하는 책무를 나눠 가진 국가, 시민사회, 기업 중에서 특히 기업의 역할을 강조하는 ‘공존적 사회공헌’을 기업의 사회공헌 이론은 역설한다.

그러나 공동체를 가꾸는 책무를 다수 기업이 공유하는 현실에선, 나쁜 기업이 착한 기업을 누르고 경쟁에서 이길 가능성이 크다. 나쁜 기업은 공동체를 위한 가치비용(경제적, 환경적, 사회적, 윤리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투여하는 비용)을 회피하여 경쟁력을 높이기 때문이다. 나쁜 기업이란 걸 들키지 않거나, 들켜도 법과 소비자가 응징하지 않는다면 ‘나쁜 기업 전략’이 이익 극대화의 지름길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슈퍼 갑’이 자란다.

‘갑질’을 제어할 힘을 가진 주체가 을이다. 을은 나쁜 갑을 가려내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안목도 필요하다. 나쁜 갑을 벌주는 행위에도 나서야 한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소비자로서 가치비용을 기꺼이 지불하면서 지갑을 열 것이냐의 선택으로 나타난다. 만약 당신이 주주총회, 이사회, 학교운영위원회, 입주자대표회의 등 의결권을 가진 기구의 일원이라면 훨씬 용이하게 갑의 횡포 편에 설 수도 있고, 을의 눈물을 닦아주는 편에 설 수도 있다.

갑과 을은 상대적 개념이다. 누구나 어떤 관계에선 갑이 되고 다른 관계에선 을이 되는 사회관계망 속에 산다. 을이 갑이 되면 관계가 달라질까?

‘갑질’에 대해 을 입장에서 분노하는 주된 계층은 20·30대 청년층이다. 그러나 이들은 책 시장에선 다른 모든 연령대를 능가하는 큰손이며 갑이다. 대다수 출판사는 이들의 눈치를 살피고 비위를 맞춘다. 이렇게 갑과 을이 함께 만들어내는 것이 베스트셀러다. 최근 수년간 많이 팔린 책의 면면을 보면 청년층에 대한 아부가 단연 눈에 띈다.

“우리나라 청년들이 동서고금을 통틀어 가장 불행하고 힘든 세대이며… 그 잘못은 전적으로 남 탓이며… 하기 싫은 건 하지 마… 일단 자유롭게 떠나…”라는 식이다. 이런 유의 달콤한 이야기가 ‘힐링’이란 이름으로 포장되어 소비된다. 청년층은 슈퍼 갑의 위치에서 출판사에 무한 아부를 명령하고, 출판사는 이들에게 피해자 프레임과 ‘무오류’의 신성을 부여한다.

을로서 분노를, 갑으로서 아부를 소비하는 퇴행적 감정놀음은 이제 끝내자. 피해자 프레임으로 자신을 방어하고 분노를 키우는 것으론 한 걸음도 나아가기 어렵다. 갑을 관계에 혼자 맞서는 것이 두렵다면 협동하면 된다. 협동조합은 본디 약자들이 뭉쳐서 만드는 것이다. 협동조합과 같은 사회적 경제가 자본 중심 사회의 빈틈을 메우고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길이 될 수 있다.


Today`s HOT
남아공 총선 시작 의회개혁법 통과 항의하는 대만 여당 지지자들 abcd, 스펠링 비 대회 미국 농장에 설치된 태양전지판
이스라엘 공습으로 파괴된 라파 난민촌 라파 떠나는 팔레스타인 주민들
굴러가는 치즈를 잡아라! 영~차! 울색 레이스
이스라엘 규탄하는 미국 시위대 이스라엘 규탄하는 친팔레스타인 시위대 현충일에 참배하는 방문객들 산사태 현장 수색하는 파푸아뉴기니 주민들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