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27일 수요일

2009.12.30. 베토벤 교향곡 9번 ― 정명훈 / 서울시향

2009년 12월 30일(수) 오후 8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지휘 : 정명훈
독창 : 이명주(소프라노) 김선정(메조소프라노) 김석철(테너) 임채준(베이스)

베토벤, 교향곡 제9번 <합창> d단조, 작품 125
Beethoven, Symphony No. 9 in d minor, Op.125 "Choral"

언제나 그렇듯이, 무삭제판 ㅡ,.ㅡa


정명훈서울시향을 이끈 뒤로 베토벤 교향곡 9번 연주는 정기연주회로는 이번이 세 번째다. 연말에 이 곡을 연주하는 일이 지겹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같은 곡을 해마다 연주하면서 그때마다 눈에 띄게 나아진 모습을 볼 수 있으니 반가운 마음이 훨씬 크다. 지난해와 견주어 수석급 연주자는 거의 바뀌지 않았으나 합주력이 두루 늘었으며, 지난해까지만 해도 지휘자가 뜻한 바를 악단이 따라가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이날에는 지휘자의 해석이 아닌 그럴싸한 음악이 귀를 사로잡았다.

정명훈이 보여준 해석은 거의 그대로였다. 1악장 코다에 들어서며 고집저음(ostinato)이 나타나는 대목(마디 513)에서 긴 호흡으로 아첼레란도를 썼고, 4악장 처음과 2악장 둘째 주제(마디 97)에서 악보에 없는 트럼펫/호른 선율을 덧붙이는 관례를 따르지 않고 악보 그대로 연주한 일도 마찬가지였다. 3악장 마디 133에서 제2 바이올린이 악보에서 지시한 pp보다 세게 연주한 것도 비슷했는데, 다만 옛날에는 ff로 들렸으나 이날에는 mf쯤으로 들렸다. (객석 위치가 달라진 탓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악기 배치는 제법 달라졌다. 합창단을 합창석이 아닌 무대 위에 두고 팀파니를 오른쪽, 나머지 타악기를 무대 왼쪽 끝으로 몰았으며 트럼펫은 트롬본 오른쪽으로 두었다. 이 모든 일은 바로 합창단과 오케스트라 사이에 있는 독창자를 배려하려는 뜻으로 풀이된다. 오케스트라 및 합창단과 어우러지는 소리를 내려면 독창자를 그 사이에 두어야 옳다. 그러나 타악기와 트럼펫 등이 무대 뒷벽 쪽 음향 고약하기로 소문난 예술의 전당과 만나 독창자를 헷갈리게 하니 문제다. 바로 지난해 그런 일이 일어났으며, 독창자는 뒤에 투명 반사판을 쓰고도 모자라 손을 귀에 대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으나 끝내 4중창에서 화음이 자꾸만 어긋나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악기 배치를 이처럼 바꾸니 마법이 일어났다. Deine Zauber binden wieder! 글쓴이는 실연을 들을 때면 처음부터 기대를 접곤 하는 4중창에서 뜻하지 않게 균형잡힌 소리를 듣고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때 오케스트라는 음량을 크게 줄이기까지 했으며, 그런 가운데 4중창과 나란히 울리는 플루트 소리가 멋졌다. 다만, 이어지는 마디 305에서는 오케스트라가 좀 더 소리를 키웠으면 싶기도 했다.

테너 김석철은 지난 4월 말러 《대지의 노래》를 TIMF 앙상블 협연으로 멋지게 불러 글쓴이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바 있다. 김석철은 목소리가 크고 시원시원하며, 무엇보다 리듬이 굼뜨지 않고 단단해서 앞날이 크게 기대되는 가수다. 이번 연주회도 매우 훌륭했으며, 빠른 리듬이나 화려한 멜리스마(한 음절에 많은 장식음)도 야무지게 다스렸다. 우리나라에는 훌륭한 베이스나 바리톤은 많아도 훌륭한 테너는 드물어서 새삼 보물이 나타난 듯한 생각이 든다. 여린 소리를 잘 못 내고 음정이 살짝 흔들리곤 하는 단점을 이겨낸다면 세계를 뒤흔드는 가수가 될지도 모르니 기대하시라.

베이스 임채준 또한 단단한 리듬이 돋보였다. 이 곡에서 베이스(바리톤) 독창은 음역도 넓은데다가 긴 호흡으로 멜리스마를 풀어내야 해서 몹시 어려운 곡으로 꼽힌다. 그런데 임채준은 놀랍도록 깔끔한 리듬을 들려주었으며, 굳이 더 욕심을 내자면 목소리가 좀 더 묵직했으면 싶기도 했다. 또 딕션(diction)이 제법 훌륭했으나 이탈리아어 발음이 섞여 있었는데, 이를테면 'Freude'(환희)를 단모음으로 쪼개서 소리 내곤 했다.

소프라노 이명주는 맑게 빛나는 목소리로 4중창 선율을 잘 이끌었으며, 더욱이 여린 소리에서 남다른 솜씨를 뽐냈다. 목소리가 이토록 고우니 말러 교향곡 8번 제2 소프라노(그레첸)를 맡으면 어떨까 싶기도 했는데, 까다로운 멜리스마에서 리듬이 살짝 늘어지는 단점을 이겨내고 고음에서도 여린 소리를 지켜낼 수 있다면 아주 멋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조소프라노(알토) 김선정은 다른 사람보다 작은 역할이나마 균형잡힌 화음을 깔끔하게 잘 만들었다.

지난 22일 연주회 때 인상 깊었던 트럼펫 수석이 이번에도 멋진 연주를 들려주었고, 악기 특성 탓에 실수가 잦게 마련인 호른도 이날따라 현 소리와 맛깔스럽게 어우러지곤 했다. 더욱이 1악장 마디 139 또는 같은 음형이 나오는 마디 408에서 호른이 딱 알맞은 음량으로 리듬을 살린 대목이 매우 멋졌다.

이날 가장 멋졌던 곳 한 군데만 꼽자면 4악장 마디 92부터 마디 164까지였다. 첼로·콘트라베이스 레치타티보가 막 끝나고 합창 선율을 연주하면서 차근차근 소리를 키워가다가 마침내 금관이 선율을 받는 그 대목까지다. 이곳에서 이토록 긴 호흡으로 자연스러운 크레셴도를 이끌어낸 정명훈도 대단하고, 그 소리를 만들어낸 서울시향도 새삼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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