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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독립운동가 이병희씨
ⓒ 여성신문
[김나령 기자] 1919년 3·1운동 발발 1년 전에 태어나 한평생 '여성 독립운동가'의 삶을 숙명처럼 여기고 살아온 이병희(90)씨. 그는 16세에 공장에 위장취업해 항일운동을 이끌고, 시인 이육사와 북경망명의열단으로 활동했으며, 이육사 열사가 순국하자 그 시신과 유품을 수습해 국내 유족에게 전달하는 등 독립운동에 한 획을 그었다. 하지만 이씨는 독립운동가였던 사실을 최근까지 숨기고 살았다.

"96년 국가유공자가 될 때까지 50년간 독립운동가였던 사실을 숨기고 살아야 했어.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했던 경력이 혹시 후손들에게 누가 될까 봐…."

3·1절을 앞둔 지난 20일, 3·1여성동지회 박용옥 회장, 김옥한 부회장과 함께 이병희씨를 만나 긴 대화를 나눴다. 짧은 커트머리에 양장차림을 한 이씨는 90세란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활동적으로 보였다. 과거를 회상할 때는 여성 독립운동가의 열정이 되살아나는 듯 눈빛이 성성하게 되살아났다.

'이육사 동거인'에서 '독립운동가'로 재조명...96년 애족장 받아

꼭꼭 숨어 살던 이병희씨를 세상에 내놓은 건 어느 방송국의 다큐멘터리 제작팀이었다. 이육사에 대한 프로그램을 제작하던 방송국은 이육사 사망신고를 했던 이병희씨에 대한 기록을 확인하고 의문이 생겼다. 당시에는 '이병희'라는 인물의 생존 여부는 물론 그가 여성인지 남성인지, 어떤 역할을 했는지 등 모든 게 불투명했다.

이육사의 유가족을 중심으로 집요하게 추적한 결과, 이병희씨가 이육사 열사의 손녀뻘되는 친척으로 독립운동을 했던 여성이며 현재 국내에 생존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방송으로 이병희씨와 부친 이경식씨의 독립운동 업적이 드러났다. 그 결과 이씨와 작고한 부친 이경식씨는 1996년 애족장을 수훈하고 독립유공자로 이름을 올렸다.

"그 기쁨이야 말로 못하지….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한 죄로 불이익이 있을까봐 독립운동했던 것도 숨기고 살았는데 늦게라도 훈장도 받고, 독립운동가로 인정해주니 이제 원이 없어."

이씨의 가족은 전부가 다 애국지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독립운동에 매진한 일가다. 조부 이원식 열사는 이육사와 형제처럼 지낸 사이로 동창학교를 설립해 민족교육을 이끈 독립운동 1세대다. 부친 이경식 열사도 암살단원으로 활동했다.

'좌파' 여성 독립운동가로 얼마 전에야 공을 인정받아 건국포상을 수훈한 이효정 여사도 그의 친척이다.

이런 집안의 분위기 때문인지 가부장적 사회에서도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됐다는 게 이병희씨의 설명이다.


생존 여성독립운동가는...
258명 중 15명...94세 이효정씨 최고령

보훈처에 따르면, 2006년 12월 말 기준 생존한 독립유공자는 258명이다. 이중 여성 독립유공자는 이효정, 이병희, 지복영, 김정숙, 민영주, 신순호, 정영, 백옥순, 최예근, 박기은, 오희옥, 전월선, 송정환, 류순희, 이광춘씨 등 총 15명에 불과하다.

생존한 최고령 여성 독립운동가 이효정(94)씨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로 2006년에야 비로소 건국포장을 수훈받고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이씨는 이재유 선생이 조직한 비밀결사조직 '경성 트로이카'의 구성원이었으며, 1933년 서울 경성제사공업 파업활동 및 노동조합에 가담해 항일운동을 하다 체포돼 1년여 옥고를 치렀다. 이씨는 현재 인천의 작은 연립주택에 살고 있으며 고령에도 불구하고 과거 독립운동을 회상하는 시를 쓰고 있다. 이병희씨와는 친척 간이다.

지복영씨는 지청천 열사의 딸로 여성 광복군으로 활약했다. 김정숙씨는 1937년 학생전시복무단을 조직하고 1938년 한국독립당에 가입해 활동했다. 신순호(85)씨는 1938년 한국광복지선청년공작대에 입대해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1942년 임시정부 회계부에서 근무했고 1945년 8월에는 임시정부 외무부 정보과에 파견돼 근무하던 중 광복을 맞이했다. 신씨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훈했다.

이밖에 독립유공자는 아니지만, 독립운동한 경력을 인정받은 인물로는 '제1회 윤희순 상'을 수상한 남동순(104)씨가 있다. 남씨는 유관순 열사와 6살에 만나 이화학당에서 함께 공부했으며, 독립운동도 함께 하는 등 둘도 없는 친구이자 동지로 활동했다.

남씨는 3·1운동 직후 결성된 독립운동단체 7인결사대에 여성으로는 유일하게 참여해 독립군 자금을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했고 독립촉성부인단, 대한애국부인회 등을 결성해 활동했다.
"내가 여자니까 못한다는 생각은 안했어. 식민지 현실에서 벗어나려면 여자도 당연히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

그는 서울여상 2학년 되던 해에 '종연방직'이라는 공장에 위장취업을 하고 500여명의 근로자들을 모아 항일운동을 주도한다. 이씨는 이 사건으로 4년 반 동안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다. 여성으로서 누려야 할 기본적인 권리는 물론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까지 박탈당한 채 모진 고문을 정신력 하나로 버텨냈다는 이씨.

이씨는 출옥한 후 더 이상 국내에서는 활동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북경으로 건너간다. 거기서 의열단에 가입하고 이육사 열사를 다시 만난다. 함께 무장투쟁을 준비하던 중 1943년 일경에 걸려 또다시 북경 감옥으로 압송된다. 북경 감옥에서 죽을 뻔한 걸 이육사 열사가 자신을 '결혼할 사람'이라고 속여 보호했다는 게 이씨의 설명.

"일본 순사들도 처음에는 이육사 선생의 주장을 믿지 않았지만 계속 주장하니까 그냥 아무나와 결혼하는 조건으로 나만 석방시켜주겠다고 했어. 그래서 지금은 고인이 된 남편을 만나 선을 보고 위장결혼을 하기로 하고는 출옥을 했지."

이씨는 출옥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이육사 열사가 사망했다는 기막힌 소식을 듣는다. 그는 이육사의 동거인으로 돼 있었기 때문에 손수 육사의 시신과 유품을 챙겨 정리할 수 있었다.'광야' '청포도' 같은 시도 사실은 이씨가 없었더라면 우리에게 알려지기도 전에 사장됐을 것이다.

젊은 세대 역사 무관심 아쉬워... "3·1운동 정신 영원해야"

그 후 이씨 부부는 곧 해방을 맞게 되고 서울로 돌아온다. 6·25를 겪으며 좌파인 것이 밝혀진 친척 둘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고 이씨는 숨어 살기로 결심한다. 이씨는 건설업을 했던 남편 조인찬씨를 내조하며 아들 하나를 낳고 딸 하나를 입양해 키우며 조용히 살았다. 그렇게 반세기를 보내는 동안 세상이 바뀌었다.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도 인정을 받는 세상이 마침내 온 것이다.

파란만장했던 삶. 그라고 왜 후회가 없었을까. 하지만 이씨는 여성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이 자랑스러웠다고 말한다.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기며 힘들게 살았지만 후회는 없어. 고문에 못 이겨서 조금이라도 변질됐다면 조상님들 뵐 면목이 없었을 거야. 그저 나라에 누가 되지 않게, 가문에 누가 되지 않게 행동하려고 노력했지."

같이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하나둘 스러져가고 젊은 세대들은 점점 역사에 무관심해져가지만 이씨의 '독립운동'은 절절한 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씨는 몇 년 전부터 양로원, 종교단체, 사회단체 등을 닥치는 대로 다니며 독립운동 유공자들을 찾고 있다. 같이 활동했던 사람들을 찾아내 독립유공자로 올려주고, 그 후손에게 자랑스러운 조상의 명예와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게 하는 게 이씨의 마지막 과제다.

"요즘 젊은 사람들, 역사에 자꾸만 무관심해져서 안타까워. 이렇게 되면 우리 대에서 독립운동의 기억이 끊기고 말 테지…. 젊은이들이 과거 독립운동이 왜 일어났고, 그 정신이 어떠했는지 관심을 갖고 기억했으면 좋겠어."

몇 안 되는 생존 여성 독립운동가 이병희씨의 절규다.

독립유공자 연금 결혼한 여성 후손도 받을 수 있다
올해부터 연장자 우선지급으로 개정돼

이젠 독립유공자의 연금수급권에 있어 양성평등 원칙이 적용돼, 기혼여성과 외가 쪽 후손까지 연금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됐다. 국가보훈처(처장 박유철)는 올해부터 독립유공자가 사망할 경우 남녀, 기·미혼 구분 없이 연장자 후손 1인을 대표수급자로 선정하고 연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그동안은 처, 자녀, 손자녀 순으로 연금이 지급되고 동순위일 경우 연장자 우선으로 연금이 지급됐다. 하지만 연장자가 기혼여성일 경우 대표수급권은 호주승계가 가능한 남자형제나 손자에게 넘어가, 사실상 출가여성과 그 가족의 경우에는 연금혜택을 거의 받을 수 없었다.

이에 보훈처는 이런 조항이 남녀평등에 어긋난다는 여성가족부의 시정권고조치에 따라,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등 관계법을 개정하고 결혼 여부와 관계없이 연장자 후손에게 우선적으로 연금수급권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보훈처 보상급여팀 관계자는 "이번 조치는 출가한 여성후손은 물론 그 자녀까지 대표수급자가 될 수 있으며, 독립유공자의 연금이 외가 쪽으로 넘어올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획기적인 일"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기존 여성유족들에게는 관련법이 적용되지 않고, 남성유족들의 반발도 심한 만큼 논란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다. 보훈처 관계자는 "이전 유족들의 경우에는 기존 권리를 인정하되 권리를 포기할 경우 개정안에 따라 대표수급자를 다시 정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유연하게 대처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여성독립운동가의 발굴과 재조명도 절실한 실정이다. 보훈처에 따르면 2006년 12월말 기준, 포상을 받은 독립유공자는 총 1만623명. 이중 남성은 1만460명이지만 여성은 163명에 불과하다.

여성독립유공자가 적은 이유는 당시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여성의 수가 적기도 하지만,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기록이나 참고자료가 적고 덜 알려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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