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감리서 수감 당시 축조 1914~15년 공사장 끌려가
길이 440m 아직도 그대로 광복 뒤 순회 첫 방문지 인천
▲ 왼쪽 사진은 축항(인천 내항) 공사 당시 노역 장면이다. 1914년 김구 선생도 서대문 형무소에서 인천으로 이감된 후 이 공사장에서 노역했다고 알려져 있다. 사진 속에 강제노역을 하고 있는 인부들을 일본 순사가 지키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100년이 지난 2018년 2월 인천 내항 부두에 일제 강점기에 강제노역으로 쌓은 화강암 축대가 남아 있다. 양쪽 사진 중앙에 보이는 곳이 월미도이다. /양진수 기자 photosmith@incheonilbo.com
아침저녘 쇠사슬로 허리를 마주매고 축항공사장에 출역을 한다.
흙지개를 등에 지고 10여길 높은 사다리를 밟고 오르내린다.
불과 반일에 어깨가 붓고 등창이 나고 발이 부어서 운신을 못하게 된다.
-김구 백범일지-

백범 김구(1876~1949년) 선생이 투옥 중 인천항 축항공사에 끌려나가 모진 고생을 한 기억의 한 장면이다.
인천항만공사, 인천발전연구원, 인천시 역사자료관 등에 따르면 백범 김구 선생이 인천감리서 수감 당시(1914~1915년) 축조되었던 인천항 축항 길이 440여m가 아직도 건재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화강암의 축대형태로 건설된 인천항 축항은 현재 인천항 1부두에 남아 있다. 이는 1974년 등에 콘크리트로 축조된 인천항의 공사기법과 대비된다.인천축항은 일제가 한반도의 수탈을 목적으로 1912년 착공해 1918년 완공됐다. 따라서 올해로 100년을 맞는다.현재 인천항 1, 8부두는 일부가 개방돼 시민들의 방문이 가능하다. 하지만 축항의 경우, 항만도로를 지나 해안에 설치돼 있으므로 실제 접근은 불가능하다. 다만 50여m 떨어진 곳에서 볼 수 있다.

백범 김구 선생은 1896년 2월 안악군 치하포에서 국모(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인 육군 중위를 살해하여 일본인의 침략에 항거했으나, 그해 5월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인천감리서에 이감됐다. 인천감리서는 1883년 8월 인천항에서의 통상사무, 외국인의 입출국, 개항장의 내외국인 재판문제 등을 관장할 행정기관이 필요함에 따라 설치되었다.

이어 3차에 걸친 신문 끝에 인천감리서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인천 지사들의 도움으로 1898년 3월19일 밤 탈출에 성공했다. 십삼년이 지난후 백범은 1911년 안명근사건의 관련자로 체포되어 17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14년 7월에 5년으로 감형되고 인천으로 이감됐다. 이때부터 1915년 8월 가출옥 때 까지 인천항 축항공사에 동원됐다.김구의 인천감리서 수감은 인천의 많은 민중들에게 애국심과 일본 침략에 대한 경각심을 높여 주었고, 1946년 전국을 순회할 당시 맨 처음 들른 곳이 바로 인천이었다.

백범은 1946년 "나는 38선 이남만이라도 돌아보리라 하고 제일 먼저 인천에 갔다. 인천은 내 일생에 뜻깊은 곳이었다. 스물 두 살에 인천 감옥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스물 세 살에 탈옥 도주하였고, 마흔 한 살 적에 17년 징역수로 다시 이 감옥에 이감되었었다. 저 축항에는 내 피와 땀이 배어 있는 것이다. 옥중에 있는 이 불효를 위하여 부모님이 걸으셨을 길에는 그 눈물 흔적이 남아 있는 듯하여 마흔 아홉 해 전 기억이 어제런 듯 새롭다. 인천에서도 시민의 큰 환영을 받았다"고 술회하고 있다.

/김신호 기자 kknews@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