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보상운동 이끈 임면수 등 7명
1903년 북수동 설립… 명문고 성장
아담스 선교사 내세워 日탄압 견뎌
▲ 독립운동가 7명이 세운 수원 최초의 사립학교이자 민족학교인 삼일학교가 1923년 세운 아담스 기념관의 옛 모습(윗줄 왼쪽)과 현재 아담스 기념관(윗줄 오른쪽)의 모습. 아래는 삼일상고(옛 삼일학교) 100주년기념관의 모습. / 이성철 기자 slee0210@incheonilbo.com
세계적인 스포츠스타 정현을 배출하며 대한민국을 테니스 열풍으로 몰아넣었던 삼일공업고등학교. 삼일공고의 모태는 삼일학당으로 수원지역 독립운동을 위한 민족학교로 설립됐다.
3·1절 99주년을 맞아 민족학교인 삼일학교의 역사가 재조명받고 있다.

115년 역사의 삼일학당은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를 거치며 삼일학교로 이름을 바꿨고, 학교법인은 삼일학원이다. 경기도민은 물론 수원시민에게조차 삼일학교가 민족학교로 탄생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잊혀져가고 있다.

1903년 5월7일 수원 보시동(현 북수동) 북감리교회에서 삼일(三一)학당이 문을 열었다.
두 칸 폭의 네 칸 장방으로 된 초가집 교회에서 남학생 11명과 여학생 3명으로 시작한 삼일학당은 이후 수원지역 명문 사립학교로 성장하게 된다.

일제강점기 당시 인재양성과 근대교육 준비를 위해서는 교육이 절실하다고 판단한 수원지역 독립운동가와 유지(有志)들이 뜻을 모아 민족학교이자, 기독교학교인 '삼일학교'를 설립한다.

수원출신 독립운동가 임면수 선생과 이하영 목사 등 7명은 당시 "삼일학원이 어서어서 알아야 한다. 우리가 너무도 모른다. 어서 배워서 알아야 한다. 국가 독립을 위한 일꾼이 되어야 한다"(삼일학교 80년사 中)며 '교육'을 목표로 삼일학교를 세웠다.

임면수 선생은 삼일학교를 세운 근대교육자이자 1907년 수원지역 국채보상운동을 이끈 독립운동가로서, 수원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학교 설립 이후 임면수 선생은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나고, 이하영 선생은 6·25전쟁 때 납북됐지만 학교는 계속해서 운영됐다. 나머지 4명은 변절했다.

수원지역 유지들은 학교의 안정적 운영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투자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어려움도 겪었다. 지역민들이 한문 글방으로 자제를 보낼 뿐 양학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삼일학당을 외면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삼일학당에는 뜻 있는 몇몇 사람들과 독립운동가의 자제들이 다니며 신학문을 배웠다. 초가집 교회를 학교 건물로 사용하면서 남녀학생을 구분하는 천을 칸막이로 쳐 놓고 학구열을 불태웠다.

일제의 탄압에 어려움도 계속 됐다.

삼일학교는 교과서를 다 빼앗기기도 했는데, 당시 애국자들은 일본인 손에서 편찬된 교과서를 쓰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 만든 교과서를 사용했다. 하지만 교과를 빼앗기면서 교과서 없이 수업을 해야만 했다.

일제강점기 일제의 교육 목표는 고등교육을 주지 않기로 하고, 부림을 잘 받을 수 있도록 하는데 있었다.
1915년 일본이 사립학교 규칙을 공포하면서 모든 사립학교가 폐교에 직면했을 때 삼일학교는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외국인 선교사를 설립자로 내세운 덕분이었다.

김동수 삼일공고 교장은 "아담스라는 선교사 이름을 빌려 설립자로 세운 탓에 일제 탄압에서 방패가 됐다"면서 "외국인 선교사들이 삼일학교 역사를 붙들고 지켜온 공로도 부인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1919년 3월1일. 만세운동 이후 삼일학교는 고비를 맞게 된다.

삼일운동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일제로부터 학교이름인 '삼일(三一)'을 바꾸라는 탄압을 받게 된다. 결국 일제의 강압으로 1940년 11월9일 학교 이름을 '팔달 심산고등소학교'로 한차례 개칭했다. 해방이후 1946년 9월1일 학교명을 수원삼일학교로 복구했다.

독립된 건물 없이 운영되던 삼일학교는 발전의 계기를 맞게 된다.

1923년 수원 매향동에 새로운 근대식 교사(校舍)를 지어 독립하게 된 것이다. 미국 아담스교회가 헌금 2만 엔을 기부해 건립되면서 '아담스기념관(North Adams Memorial)'으로 명명했다. 1923년 5월7일 기공식을 하고, 같은 해 12월12일 500여명이 참석해 성대한 낙성식을 거행했다.

삼일학교는 아담스기념관이 지어지자, 기존 교회 건물을 빌려 쓸 때 70~80명의 학생밖에 수용하지 못했던 것이 수백 명으로 늘어났다.

아담스기념관은 지금도 삼일학교를 상징하는 건물로서, 2001년 경기도기념물 제175호로 지정됐다. 현재 삼일중학교 내 자리하고 있다.

독립운동가 7명이 세운 삼일학교는 배재학당(1885), 이화학당(1886)과 함께 초창기 근대 교육기관으로 꼽히는 등 삼일학교를 빼놓고는 수원지역 독립운동을 논 할 수 없는 이유다.

/안상아 기자 asa88@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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