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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영웅들의 속마음

정윤수 | 스포츠칼럼니스트

“개척자는 외롭고 힘든 자리다. 그렇지만 특별한 의미가 있다. 앞으로도 아시아 야구와 메이저리그를 잇는 역할에 기여하고 싶다.” 지난 18일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열린 미국 프로야구 스카우트재단(HBSF) 주최 ‘야구의 정신’ 시상식에서 ‘야구 개척자상’을 수상한 박찬호의 연설이다. 그는 유창한 영어 실력에 여유 있는 유머로 의미 있는 연설을 남겼다.

[정윤수의 오프사이드]스포츠 영웅들의 속마음

박찬호가 1991년 청소년 대표로 처음 LA에 가서 다저스타디움에서 기념품을 산 일은 인상적이었다. 난생처음 미국을 방문한 고교생 박찬호는 친구들을 위해 연필같이 작은 선물을 많이 사갈 생각이었는데 별처럼 파랗게 빛나는 재킷, 곧 LA 다저스의 선수용 재킷에 매혹되어 온 종일 그 재킷을 입고 다니면서 메이저리그 꿈을 키웠다고 한다. 할리우드의 감성팔이 스포츠 영화의 한 장면 같지만, 그런 영화가 늘 그렇듯이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지는 애틋한 에피소드였다.

그러나 내게 가장 인상 깊은 박찬호의 말은 2013년 7월 MBC <무릎팍도사>에 출연했을 때다. 미국에 진출해 고생했던 얘기, 스토커에게 시달렸던 얘기, 그 유명한 ‘박찬호 쿵푸킥’ 같은 흥미진진한 얘기 도중에 박찬호는 한국 야구와 미국 야구의 현격한 문화적 차이를 말했다. 그것은 비단 야구만의 얘기가 아니라 우리 스포츠 전반에 대한 날카로운 진단이기도 했다.

그 프로그램에서 박찬호는 “한국에서 경기했을 때는 시합 후 감독이 말한 뒤 코치와 선배 순으로 얘기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반대로 경기 후 선수들이 의견을 주고받고 코치들은 가만히 있었다”고 했다. 이는 지금도 한국 스포츠의 거의 모든 현장에서 발견되는 풍경이다. 선수들이 빙 둘러서서 열중쉬엇 자세로 서 있으면 감독이 일장훈시를 하고 코치가 세부적인 잘잘못을 가리고 고참 선배가 인상을 찌푸리고 주장이 ‘자, 운동장 돌고 들어간다’ 하는 풍경 말이다. 그런 문화에 익숙했던 박찬호는 메이저리그의 격의 없는 관계와 활발한 토론 문화에 놀랐던 것이다.

[정윤수의 오프사이드]스포츠 영웅들의 속마음

▲ 박찬호·박세리·박지성·추신수…
인프라 기부를 뛰어넘어
몸속의 선진 스포츠 문화를
한국 체육계에 녹여주길…

박찬호는 “선배가 내게 의견을 물어보면 난 혼내는 줄 알고 ‘죄송합니다’라고 했다. 나중엔 의견을 말하려 해도 의사표현이 잘 안됐다. 그 후 내 의견을 말하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하다 보니 창의력과 독립심이 생겼다”고 덧붙였다. 이 또한 나라 밖의 웬만한 스포츠 선진국에 진출한 선수들이 곧장 겪게 되는 ‘문화 충격’이다. 중학교 때 호주의 존 폴 칼리지로 축구 유학을 떠난 기성용은 또래 친구들이 팔짱을 끼거나 심지어 책상 위에 발을 턱 얹어 놓고는 지도자들과 활발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서 잊을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고, 2012년 8월 SBS <힐링캠프>에서 말한 적 있다. 왜 그렇게 뛰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해답을 서로가 열심히 찾아내는 과정이었다고 기성용은 기억한다.

바로 그 학교가 있는 브리즈번에서 며칠 전 기성용은 수준 높은 경기력으로 호주의 공격을 차단했다. 일찌감치 유럽 축구계를 뒤흔든 차범근이나 그 뒤를 이은 박지성도 유럽의 스포츠 문화가 단지 잘 관리된 잔디 상태만이 아님을, 여러 차례 언급한 적 있다. 바르셀로나 유스팀에서 성장하고 있는 유승우는 엄격한 학사관리 시스템에 따라 인근 학교에서 학업에 매진하는 시간이 공을 차는 시간보다 더 많다. 학업을 마치지 못하거나 적정 수준으로 병행하지 못하면 프로 진출이 그만큼 늦어진다.

2009년의 일이다. 장래 스포츠 선수를 꿈꾸는 전국의 학생 유망주들을 두루 만날 기회가 있었다. 훈련이라는 명목의 사실상 폭력에 가까운 과도한 훈련 대신 건강하고 활기찬 스포츠 문화를 형성하기 위한 자리였다. 그 자리에서 왕년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특강을 했다. 훈련 때의 땀 한 방울이 메달 색깔을 좌우한다는 내용으로 강의를 하던 그는 무슨 일이든 꾹 참고 견뎌내는 인내력을 강조하면서 결국 우리나라 스포츠의 지도자와 스타들이 저도 모르게 내면화하고 있는 이야기에 이르고 말았다. “요즘 아이들은 인내력이 없다, 지도자가 몇 대 때리더라도 꾹 참을 줄 알아야 한다. 열 대를 때리면 차라리 백 대를 때려 주십시오 하면서 이겨내라, 부모님 생각하면서.” 이렇게 훈계조로 그의 특강은 씁쓸하게 끝났다.

비범한 스타들의 유례 없는 경험들은 그 자체로 커다란 자산이다. 박찬호·추신수 같은 메이저리거와 박지성·기성용 등 프리미어리거들 그리고 골프의 박세리나 세계 고봉 14좌 등반의 오은선 같은 사람들의 성취는 그들의 개인적 추억으로만 남길 수 없는 스포츠사의 자산이다. 그들은 이미 고향이나 모교에 스포츠 인프라를 기부하거나 재단을 만들어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에 한가지 더 부탁을 하고 싶다. 이제는 그들의 속마음까지 듣고 싶은 것이다. 고진감래 투혼기만이 아니라 그 위치에 오른 사람만이 겪을 수 있었던 문화적 경험, 그 위치에서만 보이는 인간과 스포츠에 관한 깊이 있는 성찰, 그 위치에서 바라본 한국 스포츠의 고질적인 문제에 대한 본질적인 해법 말이다. 그들의 몸속에 내장된 선진 스포츠 문화가 그들의 말과 행동으로 현실화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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