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하는 대한민국

‘홧김에’ 범죄 저지르는 사람들

류인하 기자

‘승자독식 사회’ 상대적 박탈감, 약자에게 ‘묻지마 폭력’ 표출

“다 큰 놈이 웬 염색이냐?” 지난달 13일 양모씨(35)는 아버지(67)의 잔소리를 듣는 순간 울컥 분노가 솟구쳤다. 양씨는 평소 직장이 없어 막노동을 하는 자신을 한심하게 여겨 잔소리를 하는 아버지에게 불만이 많았다. 그는 “내 마음대로 염색도 못하냐”며 대들다가 아버지로부터 따귀를 맞았다. 분을 참지 못한 양씨는 안방에 있는 목검으로 아버지의 머리를 10여차례 내리쳐 숨지게 했다. 사흘 뒤에는 아버지의 시신을 경기 화성의 한 공터에서 태웠다. 양씨는 경찰에서 “아버지의 잔소리가 너무 심해 그동안 스트레스를 받아왔는데 뺨을 맞자 화가 치밀었다”고 말했다. 서울서부지검은 7일 양씨를 존속살해 및 사체손괴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지난달 28일에는 충북 청주에서 술에 취한 고모씨(38)가 순간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술집 앞을 지나가던 30대 남성을 때리고 흉기로 목을 찔렀다. 두 사람은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고씨는 경찰 조사에서 “그냥 화가 나서 아무나 죽이고 싶었다”고 진술했다.

평범한 시민들이 단지 ‘홧김에’ ‘기분이 나빠서’ 저지르는 살인사건이 빈발하고 있다. 대검찰청의 ‘2010년 범죄분석’에 따르면 2009년 살인 혐의로 기소된 1208명 중 절반에 가까운 576명(47.7%)이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나타났다. 폭행 혐의로 기소된 15만7913명 중 6만4071명(40.6%)이, 상해 혐의로 기소된 11만6600명 중 8만8759명(76.1%)이 단순히 화가 난다는 이유로 폭력을 휘두르거나 다른 사람을 다치게 했다.

[분노하는 대한민국]‘홧김에’ 범죄 저지르는 사람들

우발적 범죄는 매년 증가하는 추세다. 2005년에는 살인 혐의로 기소된 사건 중 32.5%이던 우발적 살인이 2007년 34.4%, 2008년 35.7%로 계속 늘어났다. 특히 2009년에는 47.7%에 이르면서 1년 사이 12%포인트나 증가했다.

왜 우발적 범죄와 ‘묻지마 범죄’가 늘어나는 것일까. 전문가들은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담을 수 있는 분노가 임계치(한계치)에 다다랐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인간이 마음속에 담을 수 있는 분노의 양은 정해져 있고 그 분노가 넘치는데도, 이를 해소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폭력이라는 방식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노성훈 경찰대 교수(범죄학)는 “최근의 범죄는 ‘작심→실행’으로 이어지는 보편적 범죄결정 단계를 벗어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기본적으로 범죄자들은 물질적 필요나 성적 욕구 등 구체적 목적을 가지고 ‘작심’을 하는 단계에 머물다가 유발동기가 생기면 ‘실행’을 결정한다. 그런데 ‘우발적 범죄’는 작심단계를 건너뛰고 곧바로 실행에 들어가는 형태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노 교수는 “우발적 범죄의 경우도 작심단계는 있지만, 내용을 보면 범죄와는 직접 관련이 없는 추상적 이유 때문에 작심이 이뤄진다”고 지적했다. 학업 스트레스, 직장에서의 경쟁, 가족과의 불화 등으로 분노가 한계치에 다다른 사람들이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람이나, 자신보다 약한 사람에 대한 폭력으로 분노를 풀려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프란츠 파농이 제시한 ‘수평폭력’으로도 설명된다. 수평폭력이란 자신을 억압하는 근원을 향해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비슷하거나 나약해 보이는 사람에게 대신 분노를 드러내는 현상을 말한다. 식민지 지배를 받는 사람들이 식민지배권력에 대항하는 대신 자신의 동료나 가족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그 사례다.

그러나 우발적 범죄의 원인을 파헤치려면 이 같은 심리적 측면 외에 사회구조적 측면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불안증폭사회>의 저자인 심리학자 김태형씨는 우발적 범죄 증가에 외환위기가 중요한 작용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김씨는 “한국인들은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이 세상 누구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다는 냉혹한 진리와 한국 경제의 미래가 너무도 불확실하다는 사실을 체득하게 됐다”고 말했다. 한 가정의 가장들이 평생직장으로 여겨오던 회사에서 한순간에 대량해고를 당해도 정부는 아무런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끝없는 성장신화만 외치면서 국민에게 상처를 줘왔다는 것이다. 이런 좌절감으로 인해 한국 사회에 분노가 축적됐다는 설명이다.

[분노하는 대한민국]‘홧김에’ 범죄 저지르는 사람들

강득지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범죄심리과장도 “한국인의 삶의 구조는 외환위기 이후 완전히 바뀌었다”고 단언했다. 한국 사회는 외환위기 전까지 사회적 유대·공동체정신이 상당히 강했지만, 외환위기 이후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은 공동체가 자신을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결과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을 밟고 일어서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는 게 강 과장의 이야기다.

대부분의 서민들은 패자에 대한 배려나 관심, 존중이 상실된 승자독식 사회, 즉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다. 결국 차곡차곡 쌓인 분노, 좌절감, 상대적 박탈감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가해지면 ‘묻지마’식 폭력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 같은 분노를 풀어줄 시스템이 한국 사회에 없다는 데 있다. 강 과장은 “사람은 마음을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만 있어도 분노를 무분별한 폭력으로 분출하지 않는다”며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가족이라는 일차적 공동체마저 해체돼버린 원자(原子)화 사회”라고 진단했다. 그는 “가정이 해체되면서 분노를 다스리는 방법을 일러주고 훈육할 어른이 사라졌다”면서 “또 어울려 사는 방법을 배우는 공간이 돼야 할 학교는 철저한 경쟁의 공간으로 변질돼 버렸다”고 말했다.

양재진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는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지나친 경쟁이 가져오는 심리적 압박을 해소할 방안을 마련해야 하는데, 우리 사회에서 그 같은 문제를 해결해줄 복지제도가 잘 갖춰지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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