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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도] 오후 5시의 정치학

입력
2014.10.20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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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은 근대의 날조된 신화이며, 여성 착취의 견고한 이데올로기일 뿐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나는 아이를 낳은 후 엄청난 당혹과 혼란에 휩싸였다. ‘이거 뭐야? 아니잖아!’ 속았다는 분한 마음에 페미니즘 학자들을 만나면 종종 따지기도 했다. 엄마만 애를 보니까 엄마가 주로 애를 사랑하게 된 것이었는데, 괜히 혼자서 ‘엄마는 사실 그렇게까지 아이를 사랑하지는 않는다’는 의미로 오독했던 것이다. 모성은 ‘부모애’라는 양성 평등한 용어로 대체돼야 하며, ‘부모애’는 신화에 필적하는 형태로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 양성평등이란 게 공허한 이론일 뿐이어서 한때의 페미니스트였던 나는 하루 두 번 꼴로 경력 단절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찢겨진 자아의 워킹맘이 되었고, 기형도의 시 ‘엄마걱정’은 내면의 BGM으로 자리잡았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아이를 낳기 전에는 새벽까지 취재원과 폭탄주를 마시며 특종을 캐내는 워킹맘 선배들을 격렬하게 흠모했으나, 엄마가 된 후엔 술만 마시면 “선배는 나쁜 X이에요” 주사를 부렸다. 발생기사가 없는 고요한 출입처를 자청하며 ‘마미 트랙(mommy track)’을 밟던 선배들을 나 역시 은근히 비하한 바 있으나, 어느덧 서둘러 퇴근하는 나의 뒷모습은 그녀들과 꼭 닮아 있었다지.

여성의 경력 단절을 막기 위해 도입된 여러 제도들로 인해 나는 막대한 수혜를 입었다. 보수적 풍토의 언론계 종사자로는 드물게 두 아이를 낳고 각각 1년씩 육아휴직을 썼으며, 올 한 해는 ‘한국일보 유연근무제 1호’가 되어 출근은 하지 않은 채 서평기사만 쓰고 있다. 뻔뻔함을 무기로 얻어낸, 선배 세대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특혜지만, 이 특혜에는 피해의식이라는 비용이 수반된다. 나의 커리어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다는 생각을 나는 떨칠 수가 없다.

취재를 통해, 혹은 친교를 통해 만난 수많은 워킹맘들은 현재 한국의 민간 기업에서 심리적 저항 없이 수용될 수 있는 육아휴직 연한은 딱 1년이라고 말한다. 두 번째 육아휴직은 자발적으로 커리어에 ‘기스’를 내는 행위로, 향후 잠재적 경력단절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며, 권한과 책임을 행사하기 어려운 시간제 근무는 결코 양질일 수 없다는 게 공통된 의견이다. 여성 고용률을 높이기 위한 현재의 정부 대책은 그 어느 때보다 여성 친화적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엄마를 예외적 노동자로 만드는, ‘이급 근로자’로 도태시키는 차별과 배제의 정책이어서 출산율이나 고용률 제고로 이어지지 않는다.

“애 팽개치고 일만 했다”고 술 취한 나에게 부당하게 비난 받았던 내 선배 세대의 여성들은 여성이 ‘일급 근로자’일 수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남자처럼 일했다. 여성의 노동자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해준 그들 덕분에 고용보험을 유지하며 내 손으로 자식들을 키우는 호사를 누렸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의 최종적 해법일 수는 없다. 내 후배들, 내 딸들을 위해, 이제 우리는 남자들이 여자처럼 일하는 세상을 감히 꿈꿔야 한다.

유신시대의 통행금지처럼, 오후 5시 이후 근로금지제가 전 국가적으로 시행되는 상상을 해본다. 남편도, 아내도, 거래처도, 하청업체도, 사장님도, 대리도, 국회의원도, 어린이집 교사도, 낮 동안 부지런히 일하고 오후 5시면 모두 퇴근한다. 모두가 집에 가 있으니 혼자 남아도 할 일이 없다. 망상이 과하다는 자책이 든다면 주5일 근무제를 떠올려보는 게 좋겠다. 기업들은 죄다 망할 것처럼 난리들을 쳤지만, 아무 일 없었다. 불과 10년 전이다.

‘오후 5시의 정치학’. 이게 실현된다면, 단언컨대 나는 더 이상 일과 육아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은 엄마만 기다리지 않고 아빠도 기다릴 것이며, 나는 더 이상 같이 출발했으나 혼자만 저만치 앞서 있는 남편을 미워하는 협량한 인간이 아니어도 된다.

박선영 문화부 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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