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rrative Report]꿈을 베고 잠든 거인 ‘디지털 왕국’ 꽃을 피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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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10월 16일 17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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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디지털 디자인 업계에서 천재라는 평가를 받았던 고 최은석 디스트릭트 대표. 그는 떠났지만 디스트릭트의 사람들은 우직하게 그와 함께 꿈꾸던 것들을 이뤄나가고 있다. 아래는 2009년 6월 두바이와 런던, 싱가포르에서 동시에 열렸던 삼성전자 ‘제트폰’의 론칭 프레젠테이션 모습. 디스트릭트의 홀로그램 및 동작인식 기술을 적용해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한 장면처럼 허공의 영상을 손짓으로 제어해 보였다. 디스트릭트 제공
세계 디지털 디자인 업계에서 천재라는 평가를 받았던 고 최은석 디스트릭트 대표. 그는 떠났지만 디스트릭트의 사람들은 우직하게 그와 함께 꿈꾸던 것들을 이뤄나가고 있다. 아래는 2009년 6월 두바이와 런던, 싱가포르에서 동시에 열렸던 삼성전자 ‘제트폰’의 론칭 프레젠테이션 모습. 디스트릭트의 홀로그램 및 동작인식 기술을 적용해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한 장면처럼 허공의 영상을 손짓으로 제어해 보였다. 디스트릭트 제공

최은석과 디스트릭트


《 2012년 2월 17일 아침 로스앤젤레스. 서늘한 거리에 경찰차의 불안한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경찰차는 시내 중심에 자리한 웨스트 할리우드 호텔 앞에 멈춰 섰다. 긴장한 표정의 호텔 직원들은 조용히 그러나 빠르게 경찰들을 한 객실로 인도했다. 문을 연 그곳에 눈을 감은 체이가 있었다고, 체이와 함께 출장길에 올랐던 나의 동료는 말했었다. 온몸의 세포가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던 떨리는 목소리를, 체이의 부재(不在)를, 난 아직도 믿을 수 없다. 그로부터 며칠간 한국 인터넷에는 체이의 이름 석 자를 담은 기사들이 잇따랐다. '○○○ 대표 출장 중 과로사로 사망', '○○○ 대표 과로사 아닌 자살로 밝혀져 충격', '벤처인들, "귀한 인재 잃었다" 애도', '누가 천재를 죽였는가'…. 여러 인터넷 뉴스와 블로그에 체이를 애도하는 글들이 이어졌다. 어떤 언론사는 체이의 죽음에 대한 사설을 싣기도 했다. 체이를 아꼈던 이들과 체이처럼 되기를 꿈꿨던 학생들의 추모는 한동안 계속됐다. 유독 푸른 하늘이 시렸던 2012년 겨울날 그렇게 한국, 아니 세계 디지털 디자인 업계에서 가장 소중했던 체이를 허망하게 잃었다. 최(Chey) 씨 성의 영문명을 특이하게 써서 대표님이란 호칭 대신 체이라 불렸던 사람. 체이의 소리가 울리지 않는 고요한 회사 풍경이 나는 오늘도 생경하다. 》

● 디지털 디자인계의 별이 된 남자

차오르는 눈물을 꾹꾹 누르며 체이를 추억해 본다. 체이가 이 회사를 세운 건 2004년 6월이다. 체이와 김준한, 이동훈, 이렇게 1973년생 동갑내기 셋이서 '아트 테크 팩토리(Art Tech Factory)'를 꿈꾸며 회사를 창업했다. 뜨겁고, 푸르렀던 서른 살 무렵이다.

이제 와 드는 생각이지만 세 사람은 나이만 같은 뿐 함께 동업을 시작한 게 신기할 정도로 다른 사람이었다. 체이는 디자인에 대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형편상 경희대 사회학과에 진학한 디자인 업계의 '비주류'였다. 김준한 대표는 서울대 산업디자인학과를 나온 이른바 '정통파'였다.

김 대표는 방위산업체에서 병역특례로 일하던 시절 우연한 기회에 체이를 만났다고 한다. 당시 김 대표가 일하던 회사에 빨리 처리해야 할 프로젝트가 업무가 너무 많아서 '알바'를 썼는데 그게 체이였다고. 속으로 '전공도 안 한 놈이 해봤자 얼마나 하겠어'라고 무시했는데 가만 보니 괴물 같은 놈이었다고. 그 많은 작업을 며칠 만에 믿을 수 없이 완벽하게 해냈고, 그래서 '이 사람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김 대표는 언젠가 내게 그렇게 말했다.

창업 당시 체이는 비전공자임에도 독보적인 디자인 실력을 지녀 웹 디자인 업계 최초의 억대 연봉 프리랜서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그런 체이와 김 대표가 손을 잡고 2000년 세운 벤처가 우리 회사의 전신이 된 '뉴틸리티'였다.

이동훈 대표는 서울대 국제경제학과를 나와 삼성물산에서 상사맨으로 일하던 멀쩡한 직장인이었다. 그런데 삼성물산의 인터넷 사업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협력 업체였던 뉴틸리티를 만났고, 체이에게 반해 삼성을 팽개치고 우리 회사 창업에 합류했다.

이렇게 각기 다른 3명이 공동 대표였지만 이들은 썩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새로운 디자인 기술 개발은 체이가, 총괄은 김 대표가, 재무 관리는 이 대표가 맡았다. 새 회사를 시작하기에 더없이 좋은 삼각편대 구조였다.

이들의 로망은 명확했다. 체이는 늘 "우리는 '크리에이티브한 사람들의 집단이 비즈니스적으로 성공하는' 롤 모델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왜 한국에서는 성공한 디자이너나 미디어 아티스트의 모습이 제자 한 명 데리고 자기 사업을 하거나 교수가 되는 수준 정도에 머무르는 건지, 왜 기업으로 성공한 디자인 집단은 없는 건지, 고민하던 체이의 모습이 떠오른다.

체이는 패션 디자인이나 제품 디자인이 아닌, 디자인과 디지털 기술을 결합한 '아트 테크'를 추구했다. 체이는 "한국 디자이너는 협소한 국내 시장을 벗어나 세계로 진출해야 하고, 특히 디지털 미디어나 인터랙션 디자인처럼 새로운 기술 디자인 분야에 한국 인재들의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곤 했다. 요즘 정부가 그렇게 부르짖는 '융합 기업'을 체이는 10년 앞서 꿈꿨던 셈이다.

체이가 가장 먼저 찾은 건 '젊고 총명한 사람'이었다. 체이가 원하는 디자인 기술을 구현하려면 회사 안에 디자이너뿐 아니라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기술자들이 모두 필요했다. 체이는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다양한 사람을 뽑았다. 덕분에 몇 년 뒤 우리 회사의 직원이 100명 규모로 성장했을 때 회사에는 디자인,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담당 직원이 각각 3분의 1씩 고르게 있었다.

체이는 나를 비롯한 젊은 직원들의 역량을 최대로 끌어내는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내가 체이와 10년 가까이 일하며 가장 좋았던 점은 체이가 '경영자 같지 않은 경영자'라는 점이었다. 체이는 대표이긴 했지만 예술가나 장인에 가까웠다. 늘 '통섭의 디자인'을 강조하며 디자인 외에도 인문학, 심리학, 공학과 교류하라고 말했다. 체이와 이야기를 하다 보면 체이는 언제나 내가 전혀 깨닫지 못한, 내 안의 생각을 일깨워 줬다. 그래서 체이가 좋았다.

체이는 언제나 이전에 없던 디자인 기술을 구현해 냈다. 실제보다 더 생생한 홀로그램 구현 기술부터,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나왔던 '제스처 센싱' 기술을 비롯해 건물 전면에 3차원 영상을 씌워 입체감이 느껴지도록 디자인하는 '하이퍼 파사드' 기술까지….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디자인 기술들을 눈앞의 것으로 만들어 냈다.

체이가 우리에게 새로운 결과물을 주문하며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생각난다. '내 몸의 유전자(DNA)는 편하게, 리스크 없이 어제 한 걸 또 써먹는 걸 못 견디겠어'라는 말. 그런 체이 때문에 힘든 적도 많지만 그랬기 때문에 우리는 남과 달랐고, 독보적인 기술과 디자인 퀄리티를 가질 수 있었다.

우리의 기술에 가장 열광한 건 차별화에 목말라 있던 기업들이었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같은 국내 기업뿐 아니라 티파니, 펜디, 알렉산더 매퀸 등 글로벌 명품 브랜드들도 앞다퉈 우리와 손잡고 자신들의 쇼를 펼쳤다. 체이의 디자인 콘셉트 제안은 실패한 적이 거의 없었다. 체이의 눈 속에는 어떤 기업이라도 믿고 일을 맡기게 하는, 업계 최고 전문가의 카리스마가 있었다.

2010년 10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티파니 베이징 매장 오프닝 쇼의 모습. 이날 쇼에서 디스트릭트는 높이 47m의 티파니 건물
 전체에 3D 영상을 입혀 티파니 매장 건물을 다이아몬드, 뉴욕 본사, 티파니의 상징인 푸른 선물 상자 모습으로 잇달아 바꾸는 
기술을 선보였다. 디스트릭트 제공
2010년 10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티파니 베이징 매장 오프닝 쇼의 모습. 이날 쇼에서 디스트릭트는 높이 47m의 티파니 건물 전체에 3D 영상을 입혀 티파니 매장 건물을 다이아몬드, 뉴욕 본사, 티파니의 상징인 푸른 선물 상자 모습으로 잇달아 바꾸는 기술을 선보였다. 디스트릭트 제공
우리 작품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삼성전자 아몰레드폰의 해외용 모델이었던 '제트폰'의 론칭 프레젠테이션이다. 아무것도 없는 빈 무대에 사회자가 오르면 실제보다 더 생생한 3차원(3D) 형태의 제품 홀로그램이 허공에 나타나고, 사회자의 손짓에 따라 제품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또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콘셉트였다. 매 순간 사람들은 환호하고, 또 전율했다.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티파니 매장 오픈쇼도 생각난다. 높이 47m에 이르는 거대한 티파니 건물에 3D 영상을 쏘아 완벽한 입체감이 느껴지는 초대형 다이아몬드로 재탄생시켰다. 당시 입을 벌린 채 이 쇼를 지켜보던 수백 명의 베이징 시민을 보면서 체이와 나는 또 얼마나 신나했던가.

삼성전자 휴대전화 글로벌 마케팅 총괄자였던 지금의 이영희 삼성전자 부사장이 체이의 독창성을 높이 사면서, 우리는 2009년과 2010년에 삼성전자가 내놓은 각종 휴대전화의 해외 론칭쇼를 도맡아 전개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융합을 강조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도 체이를 특별히 아꼈다. 홀로그램 기술과 제스처 센싱 기술을 결합해 공상과학 영화 속 장면을 현실화한 우리의 쇼는 해외 언론에서도 여러 번 화제가 됐다.

2006년 런던국제광고제 금상 수상을 시작으로 2011년 iF 커뮤니케이션 디자인 어워드 수상, 같은 해 대한민국 콘텐츠 어워드 대통령상 수상에 이르기까지 국내외의 갈채도 이어졌다.

● 용역회사에서 벗어나기 위한 선택, '라이브 파크'

하지만 체이는 만족하지 못했다. 우리 회사가 용역업체가 아닌, 우리 그 자체로서 글로벌 기업이 돼야 한다는 게 체이의 생각이었다.

체이는 언젠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회사에 들어오는 직원들 대부분이 삼성이나 알렉산더 매퀸 같은 글로벌 기업 프로젝트를 하고 싶어 해. 그 프로젝트에 못 끼면 삐치기도 하고. 근데 난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삼성 일을 한다고 해서 삼성이 되는 게 아니고 매퀸 일을 한다고 해서 매퀸이 되는 게 아니잖아. 나는 매퀸 일을 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매퀸이 되고 싶어."

체이는 우리 회사가 '우리만의 것'을 갖지 못한다면 영원한 용역업체에 머무를 것이라고 걱정했다. 더 큰 회사의 성공과 더 많은 매출 성장을 위해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2011년 새해 첫날, 체이가 직원들에게 보냈던 e메일을 기억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개발한 모든 디자인 기술 역량을 결합해서 세계 최초의 디지털 테마파크를 만들어 보자는 내용이었다. 콘텐츠 개발과 플랫폼 구축, 운영까지 모두 우리 힘으로 해서, 유니버설 스튜디오와 같은 테마파크를 디지털 버전으로 구축해 보자는 게 체이의 생각이었다.

다른 경영진과 재무팀은 극심히 반대했다. 어림잡아도 개발기간 1년에 최소 80억 원의 자금이 필요한 프로젝트였다. 직원도 2배로 늘려야 했다. 웬만한 벤처기업은 엄두도 못 낼 도전이었다. 하지만 체이의 뜻은 확고했다. 이 플랫폼만 확실히 만들어 내면 우리만의 콘텐츠와 기술을 확보하게 됨은 물론이고 수출도 훨씬 큰 규모로 할 수 있다고, 그러지 않으면 글로벌 기업을 꿈꿔 온 우리의 미래는 없다고, 체이는 협박을 섞어 우리를 설득했다.

2011년 12월 8일 일산 킨텍스에 전시된 세계 최초의 디지털 테마파크 '4D 라이브 파크'의 모습. 디스트릭트의 모든 기술을 
결집한 이 플랫폼을 통해 최 대표는 디스트릭트가 용역업체를 벗어나 당당한 디지털 디자인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길 기대했다. 디스트릭트 제공
2011년 12월 8일 일산 킨텍스에 전시된 세계 최초의 디지털 테마파크 '4D 라이브 파크'의 모습. 디스트릭트의 모든 기술을 결집한 이 플랫폼을 통해 최 대표는 디스트릭트가 용역업체를 벗어나 당당한 디지털 디자인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길 기대했다. 디스트릭트 제공
마침내 1월 말, 디지털 테마파크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테마파크 이름은 '4D 라이프 파크'로 정했다. 디데이는 2011년 11월. 석 달 정도 경기 고양시 킨텍스를 빌려 테마파크의 콘셉트를 전시할 계획이었다. 수익만 따지면 할 필요도 없고 할 수도 없었던 사업이었지만, 우리에겐 회사를 용역업체에서 한 단계 더 도약시켜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다.

벤처업계의 샛별이었던 우리 회사는 3개 벤처캐피털 투자사로부터 총 75억 원을 유치했다. 경기 용인시 처인구에 있는 빈 공장 3동도 빌렸다. 이곳 총 1만 ㎡(3025평)에 '개발실'을 차리고 직원 100여 명의 책상을 놓았다. 그리고 공간 주변을 빙 둘러 거대한 디지털 스크린을 설치했다. 높이 9m, 길이 150m의 이 디지털 스크린을 캔버스 삼아 우리의 디자인과 기술을 녹여볼 요량이었다.

체이가 이끄는 라이브 파크 개발팀 120여 명의 도전이 시작됐다. 개발실 근처 빌라 여러 채를 빌려 직원 숙소로 쓰면서 합숙을 했고, 세끼 밥은 개발실 밖에 마련한 '밥차'와 그 옆 천막 아래 식탁에서 해결했다. 주 7일 근무에 툭하면 새벽 두세 시까지 개발이 이어지다 보니 주변 치킨집들은 우리를 다 알았다. 어두컴컴한 새벽에 피자 수십 판을 싣고 달리는 오토바이의 목적지 역시 언제나 우리 개발실이었다.

현장은 뜨거웠다. 라이브 파크 개발에 참여했던 김동철 선임은 얼마 전 그때를 회상하며 "너무 재밌었다"는 말을 무려 11번이나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밤낮도 없이 하루에 두세 시간만 자면서 일하는, 말도 안 되는 일정이었지만 불만은 없었어. 우리가 만드는 건 세계 최초였고, 세상에 없던 것이었으니까. 그 사실에 매일 놀라고 감탄했었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시절 우리는 의욕도, 디자인 퀄리티도, 연구개발(R&D)도, 모든 게 최고였다.

하지만 누구보다 라이브 파크에 모든 것을 걸었던 이는 체이였다. 체이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체크해야 할 일을 엑셀 파일에 한 줄 한 줄 적어 벽에 붙이곤 했다. 프로젝트 막바지에 그 줄은 수천 줄로 늘어났고, 벽에 붙인 종이도 수십 m나 이어졌다. 하지만 체이는 그걸 매일 하나하나 다 챙겼다. 체이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열정의 사람이었다.

체이는 직원들에게 새벽 3, 4시에 뜬금없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 문자를 보냈다. 책상에 엎드려 쪽잠을 자면서 "한 시간 뒤에 꼭 깨워줘"라고 신신당부하던 기억도 난다. 체이는 하루도 쉬지 않았다. 그런 체이와 함께 하는 거니까 무조건 잘될 거라고, 우리는 그렇게 믿었다.

● 실패 아닌 실패, 그리고 이별


10개월간의 개발 작업 끝에 마침내 4D 라이브 파크가 완성됐다. 라이브 파크의 콘셉트는 이랬다. 관람객이 입장하면 카메라와 컴퓨터가 모습을 분석해 관람객을 닮은 토끼 모양의 아바타를 만들어 낸다. 관람객들은 수십 m 길이의 초대형 미디어 스크린에 나타난 이 아바타를 따라 파크 안을 돌면서 3D 홀로그램, 증강현실, 미디어 아트, 설치 아트 형태로 구축된 다양한 게임과 공연, 아트 전시를 체험하게 된다.

이 플랫폼은 2011년 12월 8일 킨텍스 전시장에 그대로 옮겨져 88일간 전시됐다. 업계와 언론은 최첨단 기술이 결합된 디지털 테마파크의 등장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흥행은 별개의 문제였다. 당초 관람객 목표는 40만 명이었지만 실제 입장 인원은 15만 명 선에 그쳤다. 체이는 그래도 실패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체이는 이렇게 말했다. "라이브 파크는 우리가 처음 만든 플랫폼이고 진짜 도전은 이제 시작인 거야. 라이브 파크는 그 안의 소프트웨어만 갈아 끼우면 전혀 다른 플랫폼이 되니까 좋은 콘텐츠 업체를 찾아 수출하면 돼. 우리는 또 좋은 신제품을 개발해 보자."

하지만 투자자들의 생각은 달랐다. 전시 성과는 기대에 못 미쳤고 플랫폼 수출 성과 역시 바로 나오지 않고 있었다. 더군다나 체이의 기대치에 맞춰 라이브 파크의 완성도를 높이다 보니 개발비는 당초 예상한 80억 원을 훌쩍 넘어 150억 원이나 들어간 상황이었다. 사내 이익 잉여금은 모두 고갈돼 있었다. 주주총회에서 투자자들은 체이에게 소리쳤다. "당신, 대표 자리 내놔야 하는 거 아냐!" 그들에게 체이는 모든 일을 그르친 실패자였다.

체이는 힘들어했다. 언젠가 내게 한 말이 생각난다. "나는 아무래도 괜찮아. 나는 가족도, 뭣도, 아무도 없으니까. 하지만 직원들은 그렇지 않잖아. 아이도 있고 와이프도 있어. 그런데 나 때문에 힘들어질까 봐 그게 제일 두려워."

그즈음 체이는 미안함에 직원들에게 선뜻 아이디어 제안을 하지도 못했다. 예전과 달리 e메일 한 통을 쓰는 데도 수십 번을 썼다 지웠다.

체이의 육체도 나날이 기울어 갔다. 심각한 목 디스크 때문에 목 아래 전신이 곧잘 마비되곤 했지만 병원에 가지 않고 오랜 기간 격무에 시달린 게 문제였다. 언젠가 체이는 내게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며 "날 좀 데려가 달라"는 전화까지 걸었다.

그래도 워낙에 늘 웃는 얼굴이라 우린 체이가 괜찮은 줄 알았다. 하지만 체이는 전시가 다 끝나기도 전인 2월, 머나먼 미국 땅에서 홀로 생을 마감했다. 스파이더 맨의 원작자인 스탠 리와의 미팅을 위해 떠난 출장길에서였다. 스파이더 맨의 홀로그램 버전에 관심 있던 스탠 리는 결국 체이를 만나지 못했다.

체이의 장례는 회사장으로 치렀다. 체이의 비서였던 이주현 선임이 체이의 방을 정리하다 눈물이 터져 고생한 것을 아는지. 이 선임은 "5년 넘게 같이 일하면서 대표님이 약 먹는 모습을 한 번도 못 봤는데, 집무실에서 약이 20종류도 넘게 나왔다"며 엉엉 울었다.

체이는 참 외로운 사람이었다. 항상 밝고, 유쾌하고, 열정 넘치는 모습만 보여 사람들이 잘 몰랐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체이가 추석에도, 설날에도 언제나 혼자 회사에 나와 있었던 걸 안다. 체이에게는 이 회사가 전부였다. 체이는 곧 회사였고, 회사는 곧 체이였다. 나는 체이가 안쓰럽다. 안쓰러운 마음뿐이다.

● 절망의 계곡에서 다시 일어서다

체이가 떠난 뒤. 회사는 바닥의 바닥까지 추락했다. 업계에는 우리 회사가 망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네이버에 우리 회사 이름을 치면 체이의 이름과 자살이라는 단어가 연관 검색어로 떴다. 고객은 모두 끊겼다. 60건의 프로젝트를 제안하면 60건 모두 탈락되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고객들은 체이 없는 우리를 믿어주지 않았다.

재무 상황도 최악으로 치달았다. 디자인 기업인데 시안을 뽑을 종이 값을 대기도 빠듯할 정도였다. 월급도 제때 나오지 않았다. 몇몇 직원들은 대기업, 광고대행사 등으로 자리를 옮겼다.
체이의 뒤를 이어 회사를 이끌게 된 이 대표는 "회사가 잘나갈 때 신문에서나 보던 일이 내게 닥칠 줄은 몰랐다"며 힘들어했다. 얼마 전 그는 지난해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안 만나본 사람이 없다. 하지만 막상 망할 상황이 되니 도와주는 이는 지인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벤처의 실패와 재기를 중시한다고 하지만 실제 기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체이는 없지만, 체이가 일궈놓은, 체이의 모든 것인 회사가 아직 남아 있었다. 기일(忌日)에 가서 체이를 보려면 무조건 그 전에 회사를 정상화시켜야 한다고, 회사가 망하면 체이도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고, 우리는 생각했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직원들이 회사를 떠나지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다.

체이는 어쩌면 우리가 체이를 원망하진 않을까 걱정할지 모른다. 하지만 우린 체이가 떠난 뒤 오히려 그간 몰랐던 체이의 절실함을 조금이나마 이해했다. '체이가 참 힘들었겠구나' 하는 생각에 많이 미안했다.

우리는 다시 힘을 모았다. 어떻게든 회사를 살려야 했다. 일감이 오면 무조건 받았다. 1억 원 이상의 프로젝트만 맡던 우리였지만, 작년엔 1000만 원짜리 프로젝트까지 마다 않고 해냈다.
어떤 직원은 이런 말도 했다. "슬픈 마음뿐이라 일하기 너무 싫지만, 내가 좀 놀면 대표님이 싫어하시겠지 생각하면서 다시 일한다"고. 우리는 그냥 일했다. 체이랑 해왔던 대로. 그렇게 일했다.

경영진은 투자자를 찾아 단내가 나도록 뛰었다. 체이가 도운 걸까. 1월 KT와 YG엔터테인먼트로부터 28억 원, 18억 원을 투자받았다. 재무적 압박으로 벼랑 끝에 서 있던 회사의 숨통을 틔워준 투자였다. KT 투자가 성사된 날 1년여 만에 열린 회식 자리에서 몇몇 직원들은 눈물독이 터졌다.

올해 7월 용인 에버랜드에 문을 연 'K팝 홀로그램-싸이 공연장'의 모습. 디스트릭트와 YG엔터테인먼트가 함께 만든 조인트 벤처 'NIK'가 세운 시설로 현실만큼이나 생생한 싸이의 공연이 매일 열린다. 디스트릭트 제공
올해 7월 용인 에버랜드에 문을 연 'K팝 홀로그램-싸이 공연장'의 모습. 디스트릭트와 YG엔터테인먼트가 함께 만든 조인트 벤처 'NIK'가 세운 시설로 현실만큼이나 생생한 싸이의 공연이 매일 열린다. 디스트릭트 제공
라이브 파크 전시 시절부터 두드렸던 해외 시장에선 1년이 지난 올해가 되자 눈에 보이는 반응이 왔다. 우리는 요즘 일본 최대의 테마파크와 홀로그램 수출 계약을 진행 중이다. 중국 상하이 시와 상하이 엑스포 터에 1만 ㎡ 규모의 디지털 키즈 파크를 설립하는 프로젝트도 추진하고 있다. 이번 달엔 KT와 함께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스마트 호텔 구축 사업도 시작했다. YG와는 K팝 공연을 홀로그램으로 제작하는 사업을 한창 진행 중이다.

올해 말에는 우리 기술에 큰 관심을 보이는 중국과의 긴밀한 연락을 위해 중국지사도 세울 계획이다. 중국은 룽먼(龍門) 석굴이나 둔황(敦煌)과 같은 대규모 유적지를 3D 공간으로 구축하는 데 관심이 많다. 중국 지사 설립을 계기로 우리는 제2의 창업을 한다는 각오를 다졌다.

우리는 안다. 당시엔 실패란 비난을 받았지만 지금 우리의 성과는 결국 체이가 만든 '4D 라이브 파크' 덕분이라는 것을. 해외의 고객들은 우리가 대규모 디지털 테마파크를 직접 기획하고 만들고, 운영해 본 회사라는 데 가장 큰 점수를 준다.

체이는 오늘도 직원들의 책상 앞 곳곳에 붙어 있다. 내 책상 근처 이 선임은 가끔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체이를 보며 이렇게 말한다. "대표님, 저희 이만큼 왔어요. 살아나고 있어요. 잘되고 있어요"라고. 체이는 인사팀의 프로그램에서도 삭제되지 않았다. 체이는 지금도 여전히 우리 회사의 일부다.

체이는 생전에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고 싶어요. 명예나 돈 때문이 아니에요. 우리가 가진 재능과 땀으로, 맨땅에 세계적인 걸 만들었다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어요"라고.

체이. 최은석. 당신의 꿈은 이제 디스트릭트에 남은 우리가 완성할 것이다.

● 에필로그

내가 최은석 대표를 만난 건 4년 전인 2009년 11월의 일이다. 벤처업계가 주목하는 기업이 있다고 해서 인터뷰를 요청했다. 당시 디스트릭트는 삼성전자의 해외 제품 론칭쇼를 여럿 주관하고 있었다. 삼성의 글로벌 쇼를 도맡고 있다니 어떤 회사일까 궁금했을 뿐, 특별한 기대는 없었다. 잘나간다는 벤처기업을 인터뷰하는 건 흔한 일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없어진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있던 디스트릭트의 스튜디오에서 그를 보기로 했다. 그곳은 디스트릭트가 구현해 낸 기술을 시연하는 일종의 쇼룸이었다. 도착했을 때 쇼룸의 장비들은 꺼져 있었고, 강남의 평범한 카페 같은 분위기의 그곳에서 최 대표를 기다렸다.

최 대표는 정확히 약속한 시간에 나타났다. 슬림한 몸에 검은색 정장과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폭이 좁은 감색 넥타이를 맨 모습이 벤처 기업인이라기보다는 유명 디자이너 같았다. 반달 모양의 웃는 눈과 사근사근한 말투, 가벼운 걸음걸이가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우리는 1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그가 어떻게 '아트 테크 팩토리(디자인 기술 기업)'를 표방하는 기업을 창업했으며, 어떤 길을 걸어왔고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꿈은 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만든 기술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쇼룸의 전원을 켰을 때, 나는 전율했다.

아무도 없던 암막의 공간에 탄탄한 몸매를 지닌 한 외국 여자가 나타난 것이다. 홀로그램이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선명하고 생생한 홀로그램 속 여자는 나를 향해 빙긋이 웃고 핫팬츠 차림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일 때마다 허벅지의 살 떨림까지 뚜렷이 보였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환영에 소름이 돋았다.

놀라운 기술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한 장면처럼, 허공에 대고 손짓을 하면 화면 속 영상을 세련되게 제어할 수 있는 장비도 있었다. 나는 신기해서, 자꾸만 바보처럼 공중에 대고 팔을 휘휘 저었다. 최 대표는 그런 나를 보고 재밌어했다.

나는 그 순간 최 대표가, 그리고 디스트릭트가 꼭 잘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기술을 꿈꾸고, 이런 기술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젊은이들의 기업은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지 않는 기자를 전율하게 한 기술이라면, 세계 시장도 재패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가 죽었다. 그것도 스스로.

올해 7월, 나는 3년 만에 다시 벤처업계 담당 기자로 돌아왔고, 어떤 식으로든 그의 이야기를 풀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렵게 디스트릭트에 전화를 걸었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그렇게, 지난 3개월간 최은석을 아는 디스트릭트의 사람들을 만나서 들은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

나는 여전히 그의 꿈이 현실이 되기를, 세계의 인정을 받기를 응원한다. 부디 천국에서 편히 잠들기를.

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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