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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도전 조정특집? 다큐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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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도전 조정특집? 다큐로 계속됩니다"

입력
2015.01.16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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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츠는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고대 올림픽은 여성에게 참가는커녕 관전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현대의 모든 프로스포츠 역시 남성 위주로 발달해 왔다. 여성의 사회적 참여가 늘어나면서 스포츠계도 변하기 시작했지만 신체적 특성에서 오는 참여의 한계는 늘 존재했다. 그랬기에 그 영역에 도전하는 여성들은 늘 편견과 먼저 싸워야 했다. 하지만 세상의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을 이겨내고 남성성 짙은 종목에서 당당하게 활약 중인 이들도 있다. 그녀들은 중독된 영역에서 고독하지만 지독하게 달려 새로운 길을 쓰려한다. 스포츠계 '독한 녀자'들의 의미 있는 도전기를 5회에 걸쳐 전한다. '강한 여자'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녀자'에 두음법칙을 적용하지 않았다. -편집자주-

시리즈 다시보기☞ ①송가연 ②권봄이 ③김예지 ④지소연 ⑤김자인

지난해 9월 열린 인천 아시안게임 조정 여자 싱글스컬 결승전은 한편의 드라마였다. 조정 경기는 초반 격차가 크게 벌어지면 역전하기 힘든 경기다. 한 두 번이라도 경기를 관람한 사람이라면 쉽게 승부를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이날 흔히 말하는 '스포츠에 불가능이 없다'는 광경이 충북 충주 탄금호국제조정경기장에 펼쳐졌다. 만 스무 살의 여자선수가 초반 열세를 뒤집는 거침없는 질주로 '8분짜리 드라마'를 써내려 갔다. 한국 여자 조정 사상 첫 금메달, 그 주인공은 바로 김예지(21·화천군청)선수다.

그녀 역시 그 날의 감동을 잊지 않고 있었다. 2014년 마지막 날 한 카페에서 만난 김예지는 "그 한 경기를 치르는 8분여의 시간 동안 지금까지 겪었던 수 많은 일들이 머릿속을 스쳤다"고 말했다. 그 2km의 물길을 가로지르는 고독하고 혹독한 시간 동안 그녀의 머릿속엔 어떤 기억들이 스쳤을까. 그 날의 기억과 함께 김예지의 조정 인생을 되짚어본다.

500m. 더 할까, 말까…까마득했던 시작

대회 우승을 노렸던 김예지의 눈앞이 초반부터 캄캄해졌다. 스타트 난조로 홍콩의 리카만(29)에 선두를 내줬는데, 그 격차가 상당했다. 500m 구간을 2분08초98에 통과한 김예지는 2분04초74를 찍은 리카만에 무려 4초24나 뒤처졌다. 리카만이 저은 노의 물살조차 보이지 않았을 정도다. 보통 때 같았으면 포기하고도 남았을 경기였다. 포기해야 하나, 조금 더 가볼까? 그 때의 모습은 조정을 포기하고 싶었던 소녀 시절의 모습과 같았다.

중학교 1학년 때까지 김예지의 주 종목은 단거리 육상이었다. 그 해 다니던 서울체육중학교에 조정부가 창설되면서 소녀의 운명 역시 바뀐다. 체격도 체력도 운동신경도 또래 다른 친구들보다 월등히 앞섰던 그녀를 조정부 감독이 빼앗아오다시피 조정부에 집어넣었다. 조정이 뭔지도 몰랐던 소녀는 호기심과 설득에 이끌려 배를 탔지만, 막상 해보니 처음 생각했던 종목과는 전혀 딴판의 운동이었다. 당연히 딴마음이 들었다.

"처음엔 조정이란 게 경정 같은 보트로 움직이는 배인 줄 알았다”며 지금도 허탈 웃음을 짓는다.“단거리 달리기를 하러 서울체중에 왔는데 조정을 시작 한 뒤로 뛰는 건 중장거리 선수만큼, 체력 훈련은 역도부 선수만큼 했다. 정말 싫었다. 하루에 한번씩 운동 그만 두겠다고 얘기했다”소녀는 그렇게 악몽 같은 시간을 버틴다.

진짜 위기는 2012년에 찾아왔다. 고생한 덕(?)으로 그녀는 일찌감치 국가대표에 선발됐다. 고3이던 그 해 독일조정월드컵, 런던올림픽, 불가리아 세계주니어선수권으로 이어지는 지옥의 스케줄을 맞는다. 그러던 중 런던올림픽 대표 발탁을 놓고 친언니 같은 김슬기(수원시청·26)와 벌였던 경쟁에서 온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고, 입상을 기대했던 세계주니어선수권에서는 배의 무게가 고작 100g 미달돼 실격됐다. 결국 회의감을 이기지 못하고 때 이른 은퇴를 결심했지만 혼자만의 인생이 걸린 일이 아니었다. 단체전을 함께 뛰던 서울체육고등학교 동료들의 진학 문제가 함께 걸린 시기였다. 결국 서울체고 감독과 전국체전까지만 함께 하겠다는 조건을 걸고 은퇴를 허락 받았다. 하지만 미운 정이 더 떼기 힘들다고 했던가. 전국체전을 치르며 찾아온 알 수 없는 미련과 아쉬움이 김예지의 가슴 한구석을 파고들었다. 국제대회 성과에 대한 미련도 남았다. 때마침 실업팀 포항시청에서도 파격적인 조건으로 입단을 제안했다. ‘이게 내 운명인가보다’ 김예지는 체념 반 설렘 반의 마음으로 놓으려 마음 먹었던 노를 다시 움켜잡았다.

1000m. 나를 더 강하게 만든 사람들

1,000m 구간에 다다르니 김예지의 노에 리카만의 물살이 걸리기 시작했다. 김예지의 1,000m 구간 성적은 4분22초39. 4분19초64를 기록한 리카만과의 격차를 2초75 차이로 줄였다. 그래도 앞서기까지는 역부족이었다고 생각됐다. 하지만 그 순간, 같이 배를 타며 형제처럼 지낸 언니 오빠들의 거친 조언들이 생생히 떠올랐다.

조정 국가대표 지유진(왼쪽)과 함께. 조정 동료들은 서로가 서로의 버팀목이다. 김예지 선수 제공
조정 국가대표 지유진(왼쪽)과 함께. 조정 동료들은 서로가 서로의 버팀목이다. 김예지 선수 제공

"야 넌 정신상태가 틀려먹었어. 이길 수 있는 경기인데 정신 놓고 배 타니까 꼭 못 따라 잡는 거야. 정신 똑바로 차려! 역전 시켰어도 계속 스퍼트 내. 무조건 떨어뜨려야 돼. 안 될 것 같아? 된다니까! 금메달 못 따면 그냥 확~"

한국 조정의 남녀 간판 이선수(포항시청·27)와 김슬기. 김예지에겐 '간판 욕쟁이'다. 아직 경험과 끈기가 부족한 동생 김예지를 애정 섞인 호통으로 조련해 왔다. 김예지는 "심리적 기복이 심한 게 내 단점이었다"며 "언니 오빠들의 그 말을 떠올리니 갑자기 정신이 확 들었다"고 말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다부지게 노를 젓기 시작한 김예지의 어깨가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김예지의 노는 혼자 젓는 게 아니라 언니 오빠들과 함께 노 젓는 시합이 됐다. 언니 오빠들의 말이 맞았다. 페이스를 찾기 시작하니 역전의 가능성이 보였다.

비인기종목인 조정 선수들의 삶은 늘 그래왔다. 서로가 서로를 응원하고 다그치지 않으면 버텨내기 힘들었다. 웬만큼 큰 경기여도 녹화 중계마저 안됐고, 잘 해 봐야 기사에도 경기 결과 정도만 다뤄져 왔다. 김예지는 "가족과 주변 분들에게 항상 미안했다"고 말했다. 다른 이유 없었다. 경기장에 오지 않으면 자신의 경기를 볼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MBC의 인기 예능 ‘무한도전’에서 조정 특집을 방송하면서 주위의 관심이 커졌지만, 그때뿐이었다. 김예지는 “‘무한도전 조정특집’을 통해 조정이 알려진 게 너무 고마웠다”면서도 “하지만 우리에겐 매 순간순간이 무한도전이었다”고 말했다.

1500m. 전세 역전, 그래도 안주 할 수 없었다

정신을 다잡고 분당 31차례 노를 젓는 자신의 페이스를 안정화시켰다. 보통 28~30회 노를 젓는 여자 선수들에 비해 더 많은 노를 젓는 자신만의 장점을 살리기 시작한 것이다. 페이스를 찾으니 거칠 것이 없었다. 1,000m~1,500m 구간에서 매서운 스퍼트로 단숨에 격차를 좁힌 김예지는 결국 1,200m 지점부터 리카만을 앞질렀다. 1,500m 구간 기록은 6분33초54. 6분37초97을 기록한 리카만에 무려 4초43를 앞섰다. 전세는 완전히 김예지 쪽으로 넘어왔다.

중학교 시절 조정을 시작한 이후 김예지의 손엔 굳은 살이 없는 날이 없었다. 김예지는 "어머니가 처음엔 손을 잡고 우시더니 지금은 굳은살이 줄었다 싶으면 '운동 요즘 덜하나보네'라며 혀를 찬다"며 웃었다. 김형준기자
중학교 시절 조정을 시작한 이후 김예지의 손엔 굳은 살이 없는 날이 없었다. 김예지는 "어머니가 처음엔 손을 잡고 우시더니 지금은 굳은살이 줄었다 싶으면 '운동 요즘 덜하나보네'라며 혀를 찬다"며 웃었다. 김형준기자

하지만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금메달이 눈에 보인 이상 그것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남성도 힘들어하는 혹독한 훈련을 이겨낼 수 있도록 지탱해준 부모님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두 분의 힘이 보태져 김예지의 노를 젓는 어깨는 한결 더 가벼워졌다. 사실 부모는 지난해 이혼했다. 생활은 서울에 계신 어머니와 했지만, 경남 진주로 떠나신 아버지 역시 언제나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어머니는 고기를 유난히 좋아하는 딸을 위해 매 끼니 고기반찬을 식탁에 올렸고, 경기 때마다 온 지방을 따라다니며 뒷바라지 해주셨다. 아버지는 가게를 운영하시는 탓에 매 경기 찾아오시진 못하지만 매일 통화하며 인생의 코치가 되어주고 있다.

2000m 금메달…그래도 무한 도전은 계속된다

질책해 준 동료들, 길을 잃지 않도록 도운 은사들, 따뜻이 감싸준 부모님의 힘이 더해지니 배는 순풍에 돛 단 듯 결승선을 향했다. 결승선을 통과한 김예지의 기록은 8분46초52. 리카만(8분59초91)에 무려 13초39 앞섰다. 아시아 정상에 선 그 순간 꾹 눌러 참았던 눈물이 왈칵 터졌다. 금메달이 터지니 방송 카메라 앞에 설 때까지 그 감흥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 앞에서 김예지는 “주변에서 항상 ‘넌 독기가 없다, 독기만 키우면 된다’고 했던 말이 항상 맴돌았기에 독기를 품고 더 힘을 냈다”며 눈물을 흘렸다.

조정 선수 김예지. 김형준기자
조정 선수 김예지. 김형준기자

김예지는 이제 또 다른 ‘무한 도전’을 준비 중이다. 내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리는 2016 하계올림픽이 그 무대다. 현재 여자 조정 세계 최고기록은 지난 2002년 네이코바 루미아나(불가리아·42)가 기록한 7분07초71. 한국 남자 경량급 선수들의 기록이다. 김예지는 “성인 국제 무대에서 메달권을 바라보기 힘든 건 사실”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유럽의 수준과 격차를 줄이기 위해 힘 닿는 데까지 노력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룰 수 있는 성과는 어느 정도 다 이룬 그녀는 왜 또다시 ‘무한 도전’의 길을 선택했을까. 이유를 묻자 “언니들에게 받은 걸 동생들에게 물려주고 싶어서”라고 말했다. 불과 10년 전까지 아시아에서도 명함을 내밀 수 없었던 한국 여자 조정의 기록은 김슬기, 지유진(화천군청·27) 등 여자 조정 선배들이 아시아 정상권까지 그 실력을 끌어올리며 메달의 기쁨을 맛보기 시작했다. 그 기록을 바라보고 달려 온 김예지는 “내가 그랬듯 후배들이 더 큰 목표를 품고 달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기록을 끌어올리겠다”고 거듭 했다. 김예지는 오는 7월 개막하는 광주 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 때부터 자신이 세운 이 목표를 위해 다시 노를 젓는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예능 속 ‘무한 도전 조정 특집’은 끝났지만 우리들의 ‘무한 도전’은 다큐로 계속 된다”며 꾸준한 관심을 호소했다.

김형준기자 mediabo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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