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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이 인도하는 납작한 도시

박해천 | 동양대 교수·디자인 연구

2000년대 중·후반부터 서울의 도시 경관은 빠르게 변모했다. ‘디자인 서울’의 구호를 내세운 전임 서울시장의 대대적인 공공 디자인 사업은 서막에 불과했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명동과 동대문 같은 강북의 핵심 상권을 뒤흔들어 놓았고, 그곳에서 밀려난 청년층들은 2호선 지하철을 타고 홍대 앞으로 향했다.

[별별시선]스마트폰이 인도하는 납작한 도시

지하철 역세권의 상권들도 변화의 흐름에 가담했다. 이동통신 영업점 간판의 진두지휘 아래 카페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 화장품 로드숍, 제과점 프랜차이즈, 음식점 프랜차이즈의 간판들이 해당 지역의 경관을 뒤바꿔놓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변화를 가속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떠맡은 것은 자영업에 뛰어든 중산층 출신의 베이비붐 세대였다. 은퇴 이후의 삶에 별다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이들에게 프랜차이즈 가맹점 창업은 맞춤형 선택지였다.

개별 상권마다 비슷비슷한 프랜차이즈 가맹점들이 들어서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상권의 경관 이미지가 모두 똑같은 표정으로 변모한 것은 아니었다. 주지하다시피, 특정 프랜차이즈의 개점 여부는 지역의 경제적 특성, 거주자의 계층적 분포, 유동 인구의 추이, 임대료의 수준 등을 반영하기 마련이기에 해당 상권의 경관은 일정 수준의 차별화를 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의 차별화는 업종별로 서열화된 프랜차이즈의 간판들이 지역의 변수에 따라 조합된 결과였다. 따라서 위계적인 동질화나 다름없었다. 웬만한 역세권 어디에서나 프랜차이즈 카페에 앉아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수 있었지만, 모든 곳에서 커피빈의 ‘얼티메이트 모카 아이스 블렌디드’를 맛볼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상권의 변화에 보조를 맞추듯 새로운 유형의 보행자들도 등장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2009년 11월 국내 서비스를 개시한 스마트폰이었다. 바로 이 새로운 정보기기의 주사용자층이었던 20·30대들은 촘촘하게 연결된 대중교통망을 통해 도시 내부를 이동하면서, 독특한 형태의 보행자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도시인이라면 누구나 제 나름의 지도를 머릿속에 간직한다. 그 지도의 기본 골격은 지하철이나 시내버스의 노선도 형태를 띠고 있겠지만, 특정 지역의 경관은 보행자의 눈높이에서 수집된 파편적 이미지의 형태로 기억속에 보관되어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그곳에서 걷는다는 것은 머릿속 한귀퉁이에 돌돌 말려 있던 나만의 지도를 펼쳐보며 기억의 이미지를 되새김질해보는 인지적 행위를 동반하곤 한다.

하지만 스마트폰이 등장하자, 머릿속 지도는 스마트폰의 지도 앱이 대신했고, 기억의 이미지는 터치스크린 위의 음식이나 실내 사진으로 대체되었다. 소요(逍遙)의 테크닉은 낡은 것이 되었고, 보행의 의미 역시 크게 변했다.

어떤 이들에게 이제 보행은 그 자체의 목적을 지닌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스마트폰이 제공하는 일련의 ‘사용자 경험’을 경유해 특정한 ‘과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수단일 뿐이다. 카카오톡으로 만남을 약속하고, 맛집 검색을 통해 약속장소를 정하며, 멀티플렉스 전용 앱으로 영화표를 예매한 다음, 대중교통을 이용해 목적지 근처로 이동하고 지도 앱으로 정확한 위치를 파악한다.

여기에서 거리의 프랜차이즈 간판들은 그 자체로 보행자에게 친숙한 이정표 구실을 해준다. 길눈이 어둡다면, 지도 앱의 거리 뷰 이미지를 찾아보면 그만이다.

결과적으로 스마트폰이 매개하는 도시 경험은 카페, 멀티플렉스, 음식점, 술집 등 각종 프랜차이즈 가맹점을 연결하는 이동 경로로 요약되며, 보행의 감각적 차원은 손바닥만 한 터치스크린의 표면 위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초박형으로 납작해진다. 이제 상당수의 보행자들은 누군가의 ‘고객’이 되기 위해 바쁘게 거리에서 움직일 따름이다. 낯선 풍경과 조우했을 때 곧바로 터치스크린 속으로 도망갈 마음의 준비를 한 채 말이다. 그러니 이런 도시 경험 속에서 유흥과 소비의 시간만이 지루하게 되풀이된다고 해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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