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태, 수사 못한다’에 걸겠다

김민아 논설위원

지난 10일 아침 경향신문은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10만달러, 허태열 전 실장에게 7억원 줬다’는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 단독 인터뷰를 보도했다. 오전 8시쯤 최윤수 서울중앙지검 3차장은 “검찰 수사에서 그런 진술이나 자료 제출은 없었다”고 밝혔다. 3시간여 후 상황은 급변했다. 최 차장은 브리핑에서 “어제 저녁 성 전 회장 시신을 검시하는 과정에서 메모지가 한 장 발견됐다. 금액이 기재된 사람은 5~6명이고, 경향신문에서 보도한 두 사람도 포함돼 있다”고 말했다.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브리핑이 이뤄질 즈음, 경향신문은 성 전 회장의 녹음파일 일부를 온라인에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녹음파일이 공개되지 않았다면 검찰이 메모지의 존재를 고백했을까. 검찰은 이 메모지를 유족에게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경향의 눈]‘김진태, 수사 못한다’에 걸겠다

특정 검사를 비난하려 함이 아니다. 최 차장 또한 법무부 장관-검찰총장-서울중앙지검장 지휘를 받는 처지 아닌가. 지휘 계통에는 이명재 민정특보와 우병우 민정수석도 들어 있다. 검찰은 ‘성완종 리스트’가 공개되자 공소시효부터 들먹였다. 정치자금법 위반죄는 시효가 끝났고, 단순 뇌물죄도 마찬가지이며,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죄만 시효가 남아 있다고 했다. 그런데 뇌물죄가 적용되려면 대가성을 입증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부정한 돈을 받은 사람은 처벌받아야 한다’는 법감정 따위는 아랑곳없이 법리만 늘어놨다. 묻고 싶다. 그토록 철두철미하게 법을 따지는 검찰이 왜 먼지떨이식 별건(別件)수사를 했는지. 성 전 회장은 “(검찰이) 자원 쪽을 뒤지다 없으면 그만둬야지, 마누라와 아들까지 뒤져서 가지치기 해봐도 없으니까 1조원 분식 얘기를 했다”고 주장했다.

미적거리던 검찰이 달라진 건 12일 오전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수사를 촉구하면서다. 몇 시간 후 대검찰청은 문무일 대전지검장을 팀장으로 하는 특별수사팀을 구성했다. 기존 보고 라인을 배제하고 김진태 검찰총장 직보 체제로 운영된다고 했다. 검찰의 첫 타깃은 성 전 회장이 1억원을 줬다고 밝힌 홍준표 경남지사일 것이다. 자금 전달자가 사실상 시인했고, 공소시효도 남아 있다. 친박근혜계 핵심도 아니고, 무상급식 중단으로 대중에게 ‘미운털’까지 박혔다. 가시적 성과를 내기에 안성맞춤이다. 하지만 홍 지사 한 사람으로 초대형 스캔들을 유야무야할 생각이라면 차관급인 검사장까지 지역에서 불러올릴 필요가 없다. 그런 ‘단순 작업’은 형사부 평검사 1~2명이 처리해도 충분하다.

특별수사팀의 성패는 2012년 대선자금에 칼날을 들이댈 수 있느냐에 달렸다. 성 전 회장은 2012년 새누리당 중앙선대위 조직총괄본부장이던 홍문종 의원에게 대선자금 2억원을 건넸다고 밝혔다. 정식 회계처리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홍 의원이 불법 정치자금을 받아 박근혜 후보의 당선을 위해 쓴 셈이 된다. 공소시효도 충분하다. 문제는 검찰의 의지다. 정권의 정통성을 뒤흔들 만한 사안인데 검찰이 손댈 수 있을까. ‘김진태 검찰’의 궤적에 비춰볼 때 ‘수사 못한다’ 쪽에 걸겠다.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는 지난달 ‘박근혜 정부 2년 검찰 보고서’에서 “검찰은 ‘국민의 검찰’이 아닌 ‘청와대의 검찰’로 완전히 자리 잡았다”고 평했다.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유출, 정윤회씨 국정개입 의혹, 전 산케이신문 지국장 명예훼손 사건 등에서 눈치보기와 과잉충성으로 일관했다는 것이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이광철 변호사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은 신랄하다. “검찰이 말하는 부패는 우리 모두가 아는 그 부패가 아니다. 권력자가 ‘저건 부패야’라고 지목한 것이, 검찰이 말하는 부패다. 현재의 거악은 검찰의 칼날을 피한다. 아니, 검찰이 칼날을 휘두를 생각을 안 한다.”

검찰총장 후보로 거론되다 탈락한 인사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검찰총장 내정 과정은 문자 그대로 피 튀기는 싸움이다. 한국의 힘 있는 사람은 모두 직간접적으로 뛰어든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총장이 된 사람은 평소 성향과 관계없이 VIP(대통령)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게 마련이다. 어쨌든 VIP가 ‘간택’한 거니까.” 조금 다른 이가 있었다면 채동욱 전 총장일 테다. 그는 자신을 간택해준 대통령에게 불경(不敬)했다.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수사를 원칙대로 밀어붙이다 혼외자 의혹으로 찍혀나갔다. 물러난 뒤 칩거하며 그림 그리는 일로 마음을 다스렸다.

김진태 총장이 불교에 정통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도 산사에 들어가 불경 읽을 각오만 한다면 못할 일이 없을 듯싶다. 그럴 각오까지 못하겠다면? 남은 임기 7개월18일을 반드시 채워야겠다면? 성완종 리스트 수사를 처음부터 특별검사에게 넘기는 편이 낫다.


Today`s HOT
UCLA 캠퍼스 쓰레기 치우는 인부들 호주 시드니 대학교 이-팔 맞불 시위 갱단 무법천지 아이티, 집 떠나는 주민들 폭우로 주민 대피령 내려진 텍사스주
불타는 해리포터 성 해리슨 튤립 축제
체감 50도, 필리핀 덮친 폭염 올림픽 앞둔 프랑스 노동절 시위
인도 카사라, 마른땅 위 우물 마드리드에서 열린 국제 노동자의 날 집회 경찰과 충돌한 이스탄불 노동절 집회 시위대 케냐 유명 사파리 관광지 폭우로 침수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